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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민주의정치이론,삼십년 전쟁,삼월혁명, 삼포제도 중세의 제도이야기

**♥♥** 2019. 7. 2. 18:04

삼민주의는 쑨 원이 주창한 정치 이론. 민족 민권 민생의 3주의로 되어 있기 때문에 삼민주의라 한다. 쑨 원이 중국 혁명 동맹회를 결성했을 때, 멸만 흥한 공화정 수립 지권 평균을 선언하여, 이를 삼민주의라 호칭하였으므로 이 이름이 생겼다. 신혜 혁명으로 청조가 무너지고 중화 민국이 탄생함으로써 일단 민족주의 민권주의는 달성되었지만, 실제로는 위안 스카이 등 여러 군벌이 정권을 장악하여 공화정이 유명무실되었다. 이에 쑨 원은 혁명 운동을 재정비하여 혁명 결사인 중국 국민당을 조직하고, 그 강령으로서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라는 이름의 삼민주의를 새로이 내세웠다. 오늘날 삼민주의라 함은 이것을 말한다,  이 중의 민족주의는 대내적으로는 한 만 몽 회 장 등 국내 제 민족의 평등, 대외적으로는 이들이 하나의 중국 민족으로서의 평등을 주장한 것, 민권주의는 민주 정치의 실현을 위해서, 국민이 선거 파면 창제 복결의 4개 권리를 가지는 동시에, 정부의 행정력 약화를 방지하기 위하여 치권의 확립을 주장한 것, 민생주의는 국민의 생활 안정을 도모하는 일종의 사회주의적 주장으로서, 구체적으로는 자본의 억제와 기권의 평균을 제시하고 있다. 삼민주의는 그 후 중국에 커다른 영향을 주었는데, 단 민생주의만을 쑨 원의 주장자체에 명확성이 없어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삼십년 전쟁은 독일 및 유럽에서 일어난 신교와 구교간의 국제적 분쟁으로 종교 전쟁으로서는 최후의 것이자 최대의 것이다. 이 분쟁은 대체로 4기로 나눌 수 있는데, 앞의 2기는 종교적 색채 짙었지만, 뒤의 2기는 종교적 색채가 짙었지만, 뒤의 2기는 정치적 항쟁이었다.

 제1기:보하미아의 신교도들이 팔쯔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국왕으로  받들고, 영국 왕 제임스 1세나 프로테스탄트 제후의 지원을 기대하고, 황제 페르디난트 2세에게 반항하여 전쟁을 일으켰다가 바이서 베르크싸움에서 패배, 프리드리히 5세는 네덜란드로 망명하고, 보히미아의 신교도들은 탄압당했다. 제2기:덴마아크왕 크리스찬 4세는 영국, 네덜란드로부터 군자금을 얻어, 프로테스탄트 군의 수령으로서 틸리와 발렌시타인 지휘하의 황제군과 싸워서 패전, 뤼벡조약으로 양자간에 화의가 성립되어, 크리스찬 4세는 독일에 가입하지 않을 것을 확약하였다. 이 기간 중 황제는 배상령을 내려 종교제후의 영지 회복과 루터 파만을 공인할 것을 포고하였다.

삼월혁명은 독일의 시민 혁명. 삼월전기 때에 독일 제 영방의 절대주의에 대한 혁명적 경향이 무르익고, 자유 헌법 통일을 요구하는 소리가 드높아지던중 프랑스에 2월 혁명이 일어나자, 그 여파로 비인에서 폭동이 일어나 메테르니히는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베를린에서도 데모가 일어나 합동 의회의 소집, 검열 제도의 폐지, 출판의 자유를 요구하였는데, 군대가 발포함으로써 혁명으로 진전되었다. 이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친애하는 베를린 시민에게 고함 이라는 포고를 발표하고 시민 전사자 앞에서 모자를 벗었으며, 흑 적 황색의 삼색기가 국기로 제정됐고, 또한 라인란트의 상인 캄프하우젠, 한제만 등에 의한 자유주의 내각이 성립되는 등 혁명은 성공할 듯도 하여, 통일과 헌법 작성을 위해 프랑크푸르트 국민 의회가 소집되었다. 가게른을 의장으로 한 의회는 급진 공화주의와 온건 입헌 자유주의로 대립하였는데, 후자가 다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시민 의식의 결여와 행동의 불통일 등을 틈탄 반대 세력은 반격에 들어가, 비인에선 반디시그레쯔, 라데쯔키 등의 활약으로 10월에 반혁명이 성공했고, 베를린에서도 브란덴부르크, 브랑겔 등이 군대의 힘에 의해 11월 반혁명에 성공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의회를 무시하고, 흠정 헌법 초안을 발표하는 등 왕권 신수설의 본령을 발휘하였다. 국민의회는 헌법을 작성하여 프로이센 왕을 독일 황제로 할 것을 결정하였으나 왕이 이를 거부한 데다가, 대부르조아지의 반대 세력에의 접근 때문에, 소시민 노동자로 차차 힘을 잃었고 각방도 국민 의회로부터 의원을 소환하자, 시투트가르트 잔해 의회가 군대에 의해 해산되어, 사실상 혁명은 끝났다.

삼포제도는 중세의 개방 경지 제도에 있어서의 농지 경작법에 의한 형태 대개 8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전유럽에 걸쳐 지배적이었던 경작 제도. 이 제도는 곡초식 농법과 달라 개방 경지에서만이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 특징은 동곡과 춘곡과의 윤작과 정기적인 휴경을 결합시켰다는 점과, 경작지 전체를 대락 3등분하여 이 세 방법을 순환시킨 데에 있다. 즉 경작지의 3분의 1은 동계 경작지로 밀 나맥 등 추수의 주식용 곡물인 동곡이 지배되여, 다른 3분의 1은 하계 경작지로 보리 연맥 등의 음료 원료용의 곡물인 춘곡이 재배되고, 나머지 3분의 1은 휴경되어, 이듬해 동곡 뒤에 춘곡, 춘곡 뒤에는 휴경지, 휴경지 뒤에는 동곡이라는 순서로 매년 되풀이되는 것으로, 순환 순서는 거꾸로 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여경 파종 수확 시기는 국정이나 시대에 따라 상이하나, 일반적으로는 다음과 같다. 10월에 휴경지로 된 땅은 다음 해 봄까지 목초지로서 방치되고 4~6월 사이에 방목, 7~9월 사이에 여경, 이어서 동계 경작지로 바뀌고, 10월에 동곡을 파종, 다음 해 8월에 수확하고, 그 후 9~11월까지 방목, 그 다음 해 3월까지 방치 또는 방목에 이용한 후 여경, 하계 경작지로 전환시켜 4월에 춘곡 파종, 9월에 그 수확을 끝낸뒤 10월에 재차 휴경지로 전환시킨다. 이와 같이 3년을 주기적으로 순환하였다. 18세기경 클로우버 감자 협두 등의 휴한 작물이 재배되게 되자, 이 삼포 제도는 개량 삼포제로 옮겨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