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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제국국가,빼이징조약통칭,이슬람 사라센문화 이야기

**♥♥** 2019. 7. 1. 13:11

비잔틴 제국은 중세 동유럽에 발전한 국가. 동로마 제국이라고도 불린다. 비잔틴 제국의 발단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국의 멸망까지 그 수도가 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건설하였으므로, 콘스탄티누스 제를 제국의 건설자로 본다. 그러나 로마적인 요소가 완전히 소멸한 것이 아니라, 헤라클레이오스 제가 출현할 때까지 로마 말기 초기 비잔틴 시대라고도 불리며, 이 때의 대표적인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였다. 그는 한편으로는 세속적인 황제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신학 논쟁에 개입하여, 비잔틴 황제권의 특색인 황제 지상주의의 특색을 유감 없이 발휘하였다. 그 이후 제국에는 자주 내란이 일어나 7세기 헤라클레이오서 제 때, 종전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 조직에 기반을 둔 비잔틴 제국이 탄생되었다. 그리하여 헤라클레이오스 제부터 11세기 초엽까지를 성기 비잔틴 시대라고 한다. 그는 새로이 군관구제를 채용하고, 중소 농민을 기반으로 하는 국가를 만들어 공용어로서 그리이스어를 사용하였다. 이같이 제국의 그리이스화가 촉진되었는데, 외교 정책도 종래의 서방 정책에서 동방정책으로 전향되고, 서유럽 세계와의 분열의 경향이 현저하게 되었다. 8세기의 우상 숭배 논쟁은 비잔틴 제국과 서유럽과의 분열을 가일층 촉진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또 이 시대에는 아라이바인의 손으로부터 시리아가 회복되고, 9세기에는 북방 슬라브족의 크리스트교로의 개정 등이 있어, 비잔틴 제국의 세력이 확대된 시기였다. 이같은 성기의 비잔틴 시대도 11세기 초기의 바실레이오스 2세의 치세로써 끝나고, 종래 중소 농민을 기반으로 한 사회 체제가 붕괴하기 시작하고, 대토지 소유제의 발달, 이무니테트의 양여, 프로노이아 조직의 발달, 관료 조직의 쇠퇴 등 사회 전체의 이완 현상이 대두하였다. 이에 대응하여 외교면에 있어서도, 셀주크 투르크에 의한 소아시아의 침략, 노르만인 로베르기스카르에 의한 남이탈리아령의 점령, 북방에 있어서의 슬라브족의 침입 등으로 비잔틴 제국의 국가 권력은 점차로 쇠퇴하여졌다. 더우기 왕가의 내분으로 십자군의 간섭을 초래하게 되어, 서유럽인에 의한 라틴 제국의 건설이라는 사태까지 있었다. 한때 비잔틴 제국은 국력을 회복하였으나, 14세기에 북으로부터는 세르비아, 소아시아로부터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해상으로부터 이탈리아의 여러 공화국에 의해 위협을 받아, 드디어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되었다. 중세 유럽은 서유럽과 동유럽이 분열된 시대였으나, 중세 초기에는 동유럽에 있어서 고대 문화의 전통이 보존되어 있었던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뻬이징 조약은 청이 빼이징에서 여러 나라들과 체결한 조약의 통칭. 일반적으로 빼이징 조약이라 불리어지는 것은 십수 종이나 되지만,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 3국과 체결했던 조약이다. 앞서 맺어진 텐진 조약의 비준서 교환에 즈음하여 청과 영 프간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 영 프 양국은 연합군을 파견하고, 텐진에서 뻬이징으로 진격하여, 원명원을 불태웠다. 이렇게 되자 청은 양국에 화의를 청하여 청국 대표 공친왕과 영국의 엘진, 프랑스의 그로 등 대표간에 뻬이징에서 조약이 체결되었고, 동시에 텐진 조약의 비준서도 교환되었다. 이 뻬이징 조약은 텐진 조약을 수정 중요한 것으로,  그 주요한 내용은 타꾸 사건에 대한 유감의 표명, 뻬이징에 영구적인 공사관을 설치할 것, 영 프 양국에 각각 8백만냥의 배상금을 지불할 것, 텐진 항을 개항할 것. 청은 영국에 주륭 반도를 할양하고, 프랑스에는 종래에 청이 몰수하였던 카톨릭 교회 재산을 모두 반환할 것 등을 규정하였다. 한편 당시 뻬이징 주재 러시아 공사 이그나티에프도 청에게 영 프와의 화의얄선의 댓가로 러 청간의 뻬이징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연해주를 양여받았다. 이 밖에 중요한 것은 대 벨기에, 대 이탈리아, 대 오스트리아 헝가리, 대 포르투갈, 스웨덴 등 제국과 체결한 각 통상 조약 및 타이완 사건 수습에 관하여 일본과 체결한 협정, 뤼순 따렌에 대한 25 개년 조차를 책정한 러시아와의 협정 등이 있다.

사라센 문화는 아랍인만의 문화가 아니라 8세기부터 11,2세기에 걸쳐 발달하여 13세기말에 일단 세계적 역할을 마친 이슬람 세계의 문화. 고대 오리엔트시대 이래의 서아시아 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여기에 인도, 그리이스의 문화를 혼합하여 융합시킨 세계 문화이며, 그 기조가 된 것이 이슬람교와 아랍어이다. 언어:아랍어는 원래 유목민의 언어로서 학술 사상의 표현에는 부적당하였으나, 종교상의 성스러운 언어로서 이슬람 세계의 공용어 국제어가 되었고, 압바스 조 때에 문화어 학술어로 격상되어 더욱 그 내용을 증대시키기 위해서 새로운 어휘까지 창조되어 그리이스어, 시리아어, 페르시아어의 문헌이 활발하게 아랍어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유럽의 중세를 통하여 그리이스 로마의 고전은 이슬람 세계에 보존되고 뒤에 에스파니아, 시칠리아를 통하여 유럽에 재수출되어 르네상스의 직접 간접의 원인이 되었다. 학술:사라센 고유의 학술과 외래의 학술로 대별된다. 전자는 코란을 중심으로 발달한 신앙을 기저로 하는 신학 법학 문법학 사학 등이며 후자는 철학 수학 천문학 의학 등이다. 신학은 코란의 해석 및 그것에 포함되어 있는 여러 모순의 해결로부터 출발하여 유다교, 크리스트교 등의 신학 또는 그리이스, 인도의 종교 철학의 영향을 받아 발달했고, 법학도 코란 주석학으로부터 출발하여 로마 법이나 사산 조 페르시아의 법을 받아들였다. 역사학도 마호메트 및 그 제자들의 전기 제작에서 시작되어 초기에는 전승주의적인 편년체 서술이었지만, 마수디에 이르러 합리주의적인 기전채 서술어 생겨났다. 지리학은 멕카 순례의 안내, 행정 참고용 지지류에서 시작되어, 프롤레마이오스의 지리서의 번역을 통하여 조직적인 것으로 발전되었다. 철학은 그리이스 철학의 번역에 의하여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내지 신 플라톤 파의 전통을 이어 독자적인 입장을 세웠으며,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에 영향을 미침이 컸다. 또한 그리이스 철학을 기초로 하여 인도의 여러 학술을 섭취했으며, 자연 과학도 현저히 진보하여 위대한 수학 천문학 의학의 학자가 배출되었다. 예술:시 운문은 일찌기 아랍인에 의하여 애호되었으나, 압바스 조 치하에서는 페르시아 문학의 영향을 받아 산문도 발달했고, 궁정 문학외의 이란, 인도, 아랍의 설화를 집대성한 아라비안 나이트와 같은 걸작도 나왔다. 우상 부정의 정신 때문에 미술은 별로 성행하지 않았으나, 도움 건축, 아라베스트 무늬와 이란 양식의 밀화 등이 발달하였다. 또한 중국의 종이 화약의 제조법 및 나침반의 사용법을 유럽에 전한 것도 아랍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