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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왕국국가, 불평등 조약, 블록 경제,독일비스마르크정치가

**♥♥** 2019. 6. 28. 12:35

불가리아 왕국은 발칸에 있는 국가. 다뉴브 강 하류, 발칸 산맥에 따라 흑해에 면해 있다. 민족 대이동기 직후 남하한 슬라브인을 몽고계의 불가리아인이 격파하고, 건국하여 슬라브화 되고, 그리이스 정교로 개종했다. 10세기 초, 시메온 1세 때 최성기를 맞이하였으나, 동서로 분열되어 둘 다 비잔틴 제국에 합병되었다. 이반 아센1세가 또 다시 독립, 발칸 제일의 국력을 과시하였으나, 이반아센2세가 암살된 후에 국위는 쇠퇴하여 투르크에 합병되었다. 19세기 들어 투르크의 세력의 퇴조함에 따라 민족주의가 성하기되자, 독립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불가리아 학살 사건은 이를 강렬하게 자극하였다. 러 터 전쟁 결과, 베를린 회의에서 투르크의 종주권하에 자치를 획득하였으나, 러시아, 영국, 독일 등 열강의 간섭과 국내의 대립이 있어 혼란에 빠졌다. 페르디난트는 오스트리아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병합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하고, 발칸 동맹을 체결한 다음 투르크를 격파하였다. 그러나 영토 분배에 관해 다른 동맹국의 공격을 받아 제2차 발칸 전쟁에 패배하자, 3국 동맹측에 접근하기 시작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동맹측에 가담, 참전하였다가 패배하여 뇌이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후 농민당 공산당 군부 등 사이에 정권 투쟁이 계속되었는데, 들어서자 파쇼 국가와 접근,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독일의 압력으로 추축국측에 가담하였으나, 소련군이 진입하여 체제의 변혁이 진행되고, 왕정이 폐지되어 공산 국가가 되었다.

불평등 조약은 국가간의 조약이 쌍무 호혜적이 아닌 조약.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약의 형식적 수속을 밟은 것뿐만 아니라, 국가간의 협정. 당사국 쌍방간의 양혜로 된 선언 및 교환 공문 등에도 불평동 관계가 존재하면, 그것도 포함해서 불평등 조약이라고 한다. 그 내용은 치의 법권적 특권을 핵심으로 하여 그 밖에 편무적 최혜국 조관, 협정 관세율, 불할양 조약, 주병권, 재정 감독권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이러한 불평동 조약의 발생 형태를 보면. 1)가장 일반적인 현상으로 유럽 각국 및 미국과 약소국 사이에 기본적인 국력의 차이때문에, 풍속 신앙 내지는 습관이 상위함을 구실로 불평등 조약이 강제되다시파 하였다. 그 예로는 일본, 중국, 이란, 이집트, 터어키, 타이 등을 열거할 수있다. 2)약소국이 강대국에 병합되는 과정에 있어, 어느 기간 동안은 불평등 조약 관계가 존재한다.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기 이전의 한 일 관계,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영국, 이집트 관계가 이에 해당한다. 3)병합까지는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사실상 식민지화할 필요가 있든가, 또는 가능한 경우 불평등 조약으로 작은 나라에 대한 지배 체제를 만들어 버린다. 카리브 해 제국과 미국과의 관계 및 베트남과 프랑스와의 관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불평동 조약은 국민 국가 건설 운동 및 민족주의 운동으로 철폐되었다.

블록 경제는 수 개의 국민 경제 또는 식민지 경제가 결속하여 블록을 형성한 것. 세계 공황 후, 자본주의 제국은 타국의 덤핑에 대해 상품 판매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또 원료 공급지나 자본의 수출 대상국을 장악하기 위해, 특혜 관세 제도 또는 쌍무적 통상 방식을 채택함으로써 자국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제지역과의 결합을 강화했다. 우선 영국은 오타와 협정으로 특혜 관세 제도를 중심으로 그 자치령 및 식민지로 구성되는 영제국 블록을 형성하고 제국내의 무역 관계를 긴밀하게 했다. 이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남북 아메리카 대륙을 연결하는 아메리카 블록과, 본국과 그 식민지를 결합하여 프랑스 불록이 형성되어, 각각 밖으로는 경쟁적 관세 장벽을 높였다. 이에 대하여 독일은 가을부터 발칸 제국과 긴밀한 거래 관계를 맺고, 일종의 위성국권을 창설하였다. 일본도 또한 만주 침략 이래 일 만 블록을 형성하고 중 일 전쟁 후는 일본 만주 중국 블록을, 나아가서는 대동아 공영권을 꿈꾸었다. 국제위기는 이 블록 경제에 의해 유도된 바 크다.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정치가. 쇤하우젠의 순수한 융커 출신. 괴팅겐 및 베를린 대학에서 법률학을 전공한 후, 프로이센 의회 의원이 되어 초왕당파 소속으로 3월 혁명에는 강력히 반대하였다. 프랑크푸르트의회에 프로이센 대표로서 출석하여 오스트리아와 대항하였다. 페테르스부르크, 파리 주재 대사를 지내고, 빌헬름 1세에게 소환되어 동년에 수상이 되었다. 철혈 연설을 하여 의호와 충돌을 일으켜 헌법 투쟁을 하였고, 의회를 무시하고 군비확장을 강행하여 철혈 재상이란 명칭이 붙였다. 실레스비히 흩시타인 문제로 오스트리아와 공동으로 덴마아크를 공격하였다.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전쟁의 승리로 군비 확장의 성과를 과시하였으며, 의회와도 화해하여 소 독일주의에 의한 독일 통일의 기초를 굳게 하고, 나아가 엠스 전보 사건을 계기로 한 프로이센 프랑스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베르사이유궁전에서 빌헬름 1세를 독일 제국의 황제로 하는 대관식을 올리고, 스스로도 독일 수상이 되었다. 통일을 완성한 후는 그 육성에 전념하고, 외교와 동맹에 수완을 발휘하였다. 즉, 러 터 전쟁에는 공평한 중개인을 자처하여 베를린 회의를 주최하고, 3제 동맹, 3국 동맹을 결성하여 프랑스의 고립을 꾀했다. 이러한 복잡한 외교망은 카프리비 이후 점차 감소화되어 빌헬름 2세에 의해 무장 평화의 유지는 깨졌다.  내정에 있어서는 이후 중앙당, 남독일의 카톨릭을 상대로 문화 투쟁을 전개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곤혹에 빠졌으며, 사회주의자 진압법을 재정하는 한편 사회 보장 제도를 마련하고, 자본주의의 발전에도 힘썼으나, 이후 자유 무역주의를 발전에도 힘썼으나, 자유 무역주의를 버리고 보호 관세주의를 채택하였다. 이로 인하여 여당이었던 국민자유당과도 멀어졌다. 그는 처음에는 식민지 획득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적극성을 띠어 아프리카와 남태평양에 약간의 식민지를 획득하였다. 빌헬름 2세와 충돌하여 사임한 다음 회고록을 저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