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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쿠레시티 조약,북대서양 조약 기구, 북위나라의이야기

**♥♥** 2019. 6. 28. 11:38

부쿠레시티 조약은 러시아와 오스만 투르크 제국과의 강화 조약.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로 1세는 투르크령인 몰다비아, 왈라키아의 보호와 보스포러스 해협 항해의 자유를 확보하기 위해 몰다비아를 점령하고, 투르크에서 개전하였다. 다시 불가리아에 진격하여 다뉴브 강 유역을 지배하였으나, 나폴레옹의 원정군이 모스크바에 진격하자, 부르크와 화평하기 위해 부쿠레시티에서 강화 회의를 열었다.  나폴레옹은 투르크에 전쟁의 계속을 요구했으나, 영국과 스웨덴의 간섭이 있었고, 또 러시아도 양보했으므로 부쿠레시티 평화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벳사라비아의 전토 및 몰다비아의 3분의 1을 획득하였다.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의 강화 조약 불가리아가 등루멜리아를 병합하자, 세르비아는 대 불가리아 운동이 마케도니아에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불가리아에 선전하였다. 그러나 개전 식후에 세르비아는 패배, 다음 해 열강의 간섭으로 평화는 회복되었다라는 겨우 1개조의 부쿠레시티 조약을 맺고 강화하였다.  제2차 발칸 전쟁을 종결시킨 강화 조약. 이 조약에 의해 1)루마니아는 도브루자를,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그리이스는 마케도니아의 일부와 살로니카를 포함한 트라키아를 각각 획득하였으나, 전쟁에 패한 불가리아는 동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협애부를 보유하는 것만으로 그쳤다. 2)또 그리이스와 세르비아가 각각 150만의 새 인구를 더한 데 비해, 불가리아는 40만을 얻은 데 불과하였다. 불가리아의 불만은 컸으며, 이것이 원인이 되어 불가리아는 곧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접근하였다. 이 조약은 발칸 소수 민족의 민족적 자결을 실현하고, 또 발칸 제국의 오늘날의 국경의 대요를 결정하였으나, 그들 상호간의 문제는 해소할 수 없었고, 결국 그 적대 감정이 제1차 세계 대전의 유인이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독일, 오스트리아 루마니아와 맺은 강화 조약 독일, 오스트리아군은 북몰다비아에 침입한 다음 루마니아군을 격파하고, 그 해 12월말 휴전을 성립시킨후, 다음 해 이 강화 조약이 조인되었다. 이에 따라 루마니아는 도브루자 지방을 불가리아에 반환하였다.

북대 양 조약 기구는 조인된 북대서양 조약을 기틀로 하여 형성된 미국과 서유럽의 지역적 군사적 동맹인 집단 안전 보장 기구 공산주의 세력의 신장에 대항하기 위한 유럽의 안전 보장 체제로서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간에 체결된 서유럽 5국 동맹을 북대서양과 아메리카 대륙에도 확대할 구상으로조직되었다. 이 기구의 최고 기관은 가맹 각국의 각료급 대표로 구성되는 상설이사회이며, 그 밑에 각국의 참모장으로 이루어지는 군사 위원회가 있다. 방위 지구를 북유럽, 서유럽, 남유럽, 북아메리카, 북대성의 다섯 지구로 구분하여 각각 사령부를 설치하였다.  특히 서유럽 지구의 방위를 증시하여 북대서양 군사령부를 설치하고, 본부를 파리에 두고 있었으나 브뤼셀로 이전하였다. 가맹국은 최초 미국, 캐나다,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덴마아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등 12개국이었으나, 그리이스, 터어키가 참가하였고, 서독의 참가가 승인되어 미국의 병기로써 서독의 재군비도 실현되었다. 서유럽 동맹의 결성과 함께 반공을 위한 군사적 방위 기구의 강화에 노력하고 있으나, 서독의 재군비 강화에 대한 프랑스의불만을 초래하여 기구 내부의 조정에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북위는 북조의 하나. 선비 탁발족이 세운 나라. 또 후위라고 부른다. 처음에 시라 무렌 강 유역에 정주하고 있던 선비 탁발부는 산시 북변으로 이동하여, 역시때에 성락 일대를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 서진말에 의로는 군공을 세워 진왕으로부터 따퉁지방을 얻어 대왕으로 봉해졌다. 이 대국은 십익건 때에 일단 전진에게 멸망되었으나, 전진의 의해를 틈타 그 손자 탁발 규가 대왕이 되고, 다시 위왕으로 고쳐 불렀다. 도무제는 내몽고의 각 부족을 평정하고, 오르도스의 강적 흉노 철불부의 유 위진을 격파한 다음, 후연의 모용 수의 침입을 참합파서격파, 거꾸로 남하하여 중산을 점령하였다. 다시 하란부의 대반란을 진정한 뒤, 평성으로 천도하여 국호를 위로 정했다. 이 때 부터 부족제 해산이 단행되었으며, 족인은 모두 천자의직접 지배하에 두고, 공로가 있는 부족의 유력자는 관작과 특권을 부여받았다.  동시에 한인 호족들도 중앙과 지방의관료로 등용되고, 중국식 관제가 설치되어 북조 귀족제의 기초가 형성되었다.  사를 거쳐 도시대에 북위는 유 위진의 자손 혁련씨의 하를 서쪽으로 내쫓고, 북연 북량을 멸하여 화북은 통일되었다. 그 후 2대 동안에 내정의 정비와 선비족의 한화가 이루어졌다. 굉이 즉위하자, 그는 봉록제와 유명한 균전제 삼장제의 제정, 남정을 계기로 한 뤼앙 천도의 단행, 구품 관제의 완비, 또 한 만의 부족을 융합시키고, 계보 가문의 격식을 평정하는 씨족 분정을 시행하였으며, 그 밖에 풍속 언어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인 한화 정책을 수행했다. 그러나 그 반동으로서 특별한 대우를 받지 못하고 군대의 지위에만 머물러 있게 된 구부족들의 불만이 점고하는 가운데, 특히 하급의 대우를 받고 있던 육진의 대반란이 폭발했다. 이 반란은 ㅣ진압되었으나, 북방 군인들의 세력은 가일층 중대하여 실권은 군벌 이주 영의 손으로 옮아갔고, 그의 암살 후는 장안의 우문 태와 업의 고 환의 손으로 옮겨졌다.수가 고 환을 피하여 장안의우문 태쪽으로 피하자, 고 환은 이에 대항하여 선견을 세우매, 북위는 동위 서위 분열되었다. 이 북위에서는 불교가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세력을 떨치어 원캉 룽먼 석굴 등의 우수한 불교 미술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