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역바치는형태,부족 종족이라는 형태
부역은 부역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정치적 지배자에 대한 피지배자의 노동 급부로 보는 광의의 해석과 봉건 지대의 한 형태인 노동 지대로 보는 협의의 해석이 있는데, 서양에서는 후자를 택했고, 동양에서는 전자를 택하였다. 서양:봉건 지대의 한 형태. 농노가 영주의 직영지에서 부역이라는 형태로 잉여 노동을 경제의 강제에 의하여 바치는 지대. 일반적으로 농경 부역 운반 부역 잡역으로 구분된다. 부역의 기간은 계절에 따라 구분된다. 겨울 부역에서 농노는 주에 3일간은 가내 노동, 여름 부역에서는 농경의 제초, 가을 부역에서는 주에 4~5일 동안 수확에 종사하였다. 그 밖에 특별 부역으로 봄의 파종기에 농노는 4~5일을 담당하였다. 서유럽에서는 장원 제도의 붕괴와 더불어 소멸하여 생산 지대로 전화되어 갔으나, 동유럽에서는 근세까지 존속했다. 동양:오리엔트 지방의 나일 강 유역이나 메소포타미아의 농경 사회의 기초가 되는 것은 거대한 인공 관계 조직으로 그 관리와 유지에는 사회의 전노동력을 필요로 하였으며, 이 노동력에 그 자체의 존립이 좌우되었다. 따라서 이 거대한 토목 사업은 항상 공공적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왕의 비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운하를 파고 저수지를 만들며, 신에 감사하는 신전을 짓는 것이 국왕의 가장 큰 책임으로 생각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토목 사업은 시종 부역에 의존하였으며, 부역은 납세와 병행하는 수납의 기본적 형태이었다. 또한 중국 역대 왕조의 세제에는 주로 토지의 생산물을 징수하는 것과 국민의 노동력을 직접 징수하는 것을 합해서 부역이라고도 하나, 전자는 전조 전부라고 부른 데 대하여 여기에서는 후자를 의미한다. 부역은 역대 왕조가 국민에게 부과한 강제 노동으로 역역 요역이라고 한다. 이것은 동양적인 중앙 집권적 전제 군주 국가의 국민 지배의 한 특징인 것이다. 부역의 기원은 멀리 선진 시대에까지 소급되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형태에도 여러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즉, 고대에는 일정한 연령에 따라 빈부의 차별 없이 강제 노동을 부과하였으나, 당말 이 후 차차 화폐납으로 되어 직접적 노동력 징수인 차역은 간접적 노동력 징수인 고역으로되었다. 또한 빈부의 등급에 따라 부과하였고, 그 내용도 직역이라고 하는 말단 관료의 사무에 사용하는 일이 많았다. 다시 16,7세기 이후에는 부역이 전부와 합병하는 경향이 있어, 마침내 청초의 지정은이 성립하자, 노동 징수와 토지세는 하나로 결합되었다.
부족은 고대 및 미개인의 일정한 사회 집단에 주어진 명칭으로 종족이라고도 한다. 부족의 상위 집단은 민족이고, 하위 집단은 분족 씨족 가족이다. 이것을 선사시대와 게르만족에서의 부족으로 나누어 고찰하면 다음과 같다. 선사 시대:부족의 형성은 문자의 발명 이전에 속하기 때문에, 그 성립 과정에 유물 유적으로 유추해 보면, 구석기 시대 후기인 중석기 시대에는 생산력의 증가로 인구가 늘어나 기초 집단인 군 분열이 있은 후, 원시적인 부족을 형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생산 경제가 채용되자, 군이 아닌 씨족이 전체 사회가 되어, 생산력의 증대로 분열하여 부족을 또한 형성하게 되었다. 부족의 성립에는 혈연적 유대와 자연성이 중요한 것이지만, 부족제를 정치적으로 본다면, 일정한 영역을 차지하고 정치적 조직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원초적인 의미에서는 국가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국가를 원생 국가라고 부른다. 전성 시대에 있어서의 부족의 정치 형태는 소위 원시 민주주의라고 하는 장로 회의가 있었다. 부족의 수장은 동시에 부족의 제주이었다. 또한 생산력의 발전과 생활권의 확대는 부족 결합의추세를 초래하여, 이것이 평화적이고 협력적으로 행해진다면 부족 연맹이 성립되고, 일 부족의 정복으로 결합된다면 부족 국가가 된다. 또한 부족 연맹이나 부족 국가는 중앙권력이 보다 강대하고 영역이 보다 넓은 연방이나 소왕국으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게르만족:시탐은 독일 법제학상의 용어로 3세기 무렵부터 민족 이동시대에 걸쳐 성립한 게르만족의정치적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일반적으론 종족 또는 부족이라고 번역된다. 프랑크족, 고트족, 알라만족 등이 그 예에 속한다. 또한 게르만 시대의 여러 키비타스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혈 남게르만으로 혈연적 문화적 제사적 공동체도 이에 속한다. 게르만족은 보통 서 게르만, 북 게르만,남게르만으로 구분되며, 서게르만은 프리이젠, 작센, 앙겔론, 프랑켄, 롬바르드, 북게르만은 노르웨이인, 아이슬란드인, 스웨덴인, 덴마아크인, 그리고 남게르만에는 고트, 반달, 부르군트 등의 종족으로 나뉜다. 종족은 민족 대이동 후 각기 정착지에 국가를 건립하였고, 이 종족 국가에서 유럽 각지에 민족적 색채가 농후한 중세의 여러 국가가 생겼다. 고 게르만 시대 수장제인 키비타스에서는 전시에는 수장들 사이에서 군대 지휘자가 선출되었다. 이것이 후로서 종족의 발달에 따라 후는 부족왕이 된다. 프랑크 부족에서는 그 발전 과정에 있어, 종래의 독립적인 부족을 그 국가에 포한하게 되어 부족 왕은 프랑크 왕의 지방관이 되었다. 이것이 부족후이다. 카롤링 왕조 때에 이르러 집권적 통치로 한때 부족후는 소멸하였다. 그러나 동프랑크에서 제법 빨리 부족후가 부활되어, 후에 동프랑크에서 일어난 독일 왕국은 최초 이 부족후의 연합 왕국과 같이보였다. 부족후령으로는 작센, 프랑켄, 시바벤, 바이에른 등이 있었다. 그러나 부족후령은 거의 황제 시대 중에 소멸하여, 그 후 독일의 영방들은 종족과는 별개의 기초를 바탕으로 하여 발전했다. 한테 부족후령의 존재는 독일 왕정의 발전을 결정적으로 저해한 점에 있어서 프랑스에서의 부족후 배제 현상과는 대조적이다. 독일과 프랑스 양국에 있어, 중세 이후의 정치적 발전의 차이를 부족후의존재 유무와 관련하여 논의하는 학자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