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리바르,볼세비키,봉건 위기, 봉건 제도 나라의 이야기
볼리바르는 남아메리카의 혁명가, 정치가, 군인. 베네수엘라, 콜롬비아, 페루, 에쿠아도르를 에스파니아로 부터 독립시킴으로써 해방자라 불리게 되었다. 베네수엘라의 카라카스 대농원에서 출생한 후, 유럽에 유학하여 프랑스의 계몽 사상에 심취하였다. 귀국한 이후 독립 운동에 헌신하였다. 베네수엘라, 노에바 그라나다의 독립을 선언 거듭난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거병하였다. 망명지인 서인도에서 귀국하여 안데스 산맥을 넘어 가서 누에바 그라나다를 해방시켰다. 보야카 강 유역에서 에스파니아 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베네수엘라, 뉴우그라나다, 키토 등을 합하여 보고타를 수도로 하는 대 콜롬비아국을 수립하고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카라보보 싸움에서 베네수엘라의 최종적인 독립을 획득하였고, 부하 수크레에게 명령하여 키토의 전면적 해방에도 성공하였다. 동년 라틴 아메리카의 독립 혁명 지도자인 산 마르틴과 회견하고 페루 해방을 부탁받아, 아야쿠초에서 승리하여 성공한 다음, 대통령이 되었다. 이에 남아메리카에서의 에스파니아 제국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부하인 수크레가 공략한 상 페루의 차르카스 지방에는 그의 이름을 딴 볼리비아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대 콜롬비아국은 해체된 가운데 산타 마르타에서 실의속에 사망하였다. 그의 에스파니아계 아메리카 제국을 규합하려는 꿈은 범미주의로 발전하여 그 열매를 맺게 되었다.
볼세비키는 원발음은 불리셰비키. 러시아 사회 민주 노동당의 분열 때, 레닌이 인솔한 일파. 다수파란 뜻이다. 분열의 원인은 당원 자격 문제인데, 레닌 등은 당원은당의 일정한 기관에 속하고, 언제나 당의 지휘명령에 복종하며 노동 계급의 전위인 자에 한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스톡홀름에서 연합 대회가 열리고, 런던 대회가 개최되었으나, 국회에 대한 의견 차이 때문에 멘셰비키가 조국 방위를 주창했음에 대해, 볼셰비키는 전쟁을 하기보다는 노동자 계급의 해방과 사회주의 혁명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찌메르발트 비전파 국제 회의와 키엔탈 회의에 참가하였으나, 중앙파의 카우츠키, 마르토프 등과 충돌하였다. 혁명 당시에는 소비에트내에서 극소수에 속했으나 4월 레닌의 귀국과 더불어 세력이 증대하였다. 7월 사건을 지도하여 임시 정부 타도에 힘썼으며, 실패한 후 일시 열세로 떨어졌으나 코르닐로프 반란을 전기로 하여 20만 명의 당원으로 팽창하여 정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하였다. 급진 공산주의파를 눌러 독일과 단독 강화를 맺고 당명을 러시아 공산당이라 했다. 그 후 국내전 시대에는 혁명의 성과를 지키는데 노력하는 한편, 밖으로는 제3 인터내셔날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의 수출을 시도하였다. 네프를 실시하고, 트로츠키 파르 눌렀다. 전연방 공산당, 소비에트 연망 공산당,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으로 개명하였다. 오늘날 소련에서 유일한 합법적 정당이다.
봉건 위기는 십자군이후의 중세 말기에 농민층의 상승과 이에 수반되는 영주 재산의 위기 현상. 중세 말 가격 및 유럽에서는 상품 경제의 발전으로 인하여 일반적으로 화폐 지대가 성립되자, 농민 경제가 현저하게 진전하였고, 따라서 영주의 봉건적 수탈에 날카롭게 대항하는 계급적 모순이 심화되었다. 게다가 모순이 심화되었다. 게다가 전쟁 흑사병 농민 도산에 따르는 농업 노동자의 감소, 가격 및 노임의 등귀 화폐 가치의 저락 등은 실질적으로 지대를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영주 재산은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 위기는 봉건 영주 대 농민의 계급 관계를 규정하는 여러 조건에 따라 국가마다 그 형태가 다르고, 이에 대한 영주의 대응하는 방법도 각각 상이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영주층은 이 봉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봉건 지대의 강화를 주축으로 하는 봉건 사회의 재편성을 서둘렀다. 따라서 봉건 위기의 시기는 곧 봉건 반동의 시기에 해당한다. 이 반동은 전반적으로 농노제를 유지 강화하는 형태를 취하여, 직영지 경영, 무역 지대의 부활, 그밖에 일련의 반등 입법으로 농민 경제를 억압하는 형태를 취하자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 이 위기의 결과, 영국에서는 노예제의 소멸과 독립 자영 농민의 발생으로 봉건적 토지 소유가 해체되는 경향을 나타내었고, 독일의 엘베 이동에서는 영주에 의한 농민의 부역 강화 때문에 구츠헤르샤프트가 형성되었으며 프랑스에서는 생산물 지대로 역전하여 분익소작제를 기초로 하는 봉건적 토지소유의 재편성이 진행되었다. 이러한 상이점은 후에 자본주의가 성립할 때 그 나라에 있어서의 역사적 특수성의 요소가 되었다.
봉건 제도는 서양:중세사회의 정치 제도. 영주와 농민 관계 또는 봉건적 생산 관계의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으나, 그것은 일부의 경제학자나 사회학자의 용어법이고, 일반적으로는 보다 좁은 의미의 봉건 사회의 정치 제도인 레엔 제도를 가리킨다. 따라서 봉건 제도란 봉토를 매개로 하여 맺어진 수종 관계인 것이며, 봉주와 봉신 사이의 보호와 군사적인 봉사라는 쌍무적 관계인 바잘리테트와 봉주가 봉신에 대한 봉토 수여의 관계인 은대지제가 결합된 정치 제도인 것이다. 물론 봉건 제도는 영주 대 농민 관계내지는 봉건적 생산 관계와 무관계한 제도는 아니며, 그것을 경제적 기초로 하기는 하지만, 그것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유럽과 일본에서 전형적으로 발전하였다. 중국주대의 봉건 제도라는 것은 외견상으로는 유사한 점이 있으나, 씨족 제도적 혈연 관계에 입각하고 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는 다르다. 그 성립을 역사적으로는 고찰하면, 이슬람 교도가 서유럽을 침입했을 때, 카알 마르텔이 기병 전술을 하기 위하여 교회령을 공수하여 그것을 가신에게 준 데서 제도적으로 성립하였다고 하나, 오늘날 그 결정적 의의는 부정되고 있다. 바잘리테트와 은대지제의 결합은 이미 메로빙 시대에 왕 및 지방 호족들 사이에서 시행되고 있었는데, 레엔 제도가 국가제도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카롤링 초기라고 추측되고 있다. 즉 메로빙 발기에 진전한 호족 체제 및 그라프 등 국가 관료의 중앙 권력으로부터의 독립화를 앞두고, 카롤링 초기의 왕들은 국가적 통일을 재건하기 위하여 그들과 봉건 관계를 성립시키고, 그들의 소령과 관직을 봉토로서 용인하고, 이무니테트를 수여함과 동시에 국왕에 대한 충성의 의무를 지웠던 것이다. 봉건 제도의 최성기는 11~13세기의 일로서, 이 때에 국왕을 최고의 봉주로 하는 봉건 관계가 차례로 하금 영주에 미치어 피라미드 형의 정치 질서가 전면적으로 성립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12~13세기 이래 화폐 경제가 농촌에 침투하여, 장원제가 빌리카치온제에서 지대 장원으로 변화하고, 봉건 위기가 심하됨에 따라 봉건 제도는 동요하기 시작했다. 국왕은 봉신의 정치적 권력을 자기에게 집중시키려고 노력했고, 영주층은 한때 등족제에 의하여 왕권에 대항했지만, 농민의 반봉건 투쟁이 격화됨에 따라 차례로 왕권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므로, 봉건 제도는 실질적으로 붕괴되고, 절대주의가 형성되게 되었다. 그러나 절대주의는 정치 제도로서의 봉건 제도의 부정위에 성립한 것이지만, 봉건적 정치권력이 국왕에게 집중되는 형태를 취한 절대주의는, 영주와 농민과의 관계를 부정하기는 커녕 오히려 보호하였다. 중국:봉건이란 용어는 주대의 국가 체제를 가리킨 데서 비롯된 것으로 군현 제도에 대응한 개념으로사용되었다. 그러나 서유럽 중세의 봉건 제도는 봉토를 매개로 하는 가부장제적 명령 복종 관계였다는 점이 다르다. 주 대의 봉건제도는 채읍 관계가 있어, 정치 제도의 외형상으로는 서유럽의 봉건 제도와 유사하지만, 씨족 제도적 혈연 관계였기 때문에, 양자는 결코 동질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봉건 제도를 서유럽 중세의 레엔 제도에만 국한시킨다면, 동양에서는 그 어떤 시기에도 발견하기 어렵지만,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 양식에 대립하는 전단계적인 생산 양식을 가진 사회 기구, 즉 농노제를 바탕으로 한 국가 체제를 봉건 제도로 본다면 중국 한국 일본에서도 봉건 제도를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봉건 제도로서의 농노제가 중국에서 성립되고 존재한 시기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학설이 있다. 1)진한 이후의 대토지 소유제도하의 농민 3)국 시대 이후의 부곡 전객 및 당송의 전호를 농노로 규정하고, 이시기에 농노제의 존재를 인정하려는 설 2)삼국 시대 이후 대토지 소유하의 부곡 및 송대이후의 전호를 농노로 보고, 농노제의 시기를 당송시대 사이로 인정하고그것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 설 3)삼국 시대이후의 부곡을 농노로 보고, 전호와 지주와의 관계를 근세적이며 자유스러운 계약 관계로 보는 설, 4)부곡은 일종의 고대 노예제적 형태로 보고, 송대 이후의 전호를 중세의 농노로 보는 설 등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유력한 것이 4)의 것으로, 이에 따른다면 중국 봉건 제도의 시기는 송대 이후, 근대의 토지 개혁과 농민 해방이 될 때까지를 말한다 할 것이다. 일본:일본의 봉건 제도는 여러 가지 경우로 해석되지만, 이것을 서양의 레엔 제도와 결부시켜 생각할 때, 일본의 카마쿠라 바쿠후 창설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즉 카마쿠라 바쿠후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텐노오의 명으로 일본 전국에 슈고 지토오를 임명할 권한을 얻었는데, 이 때 그는 자기에게 충성을 다하는 자기의 종자인 무사를 지토오로 임명하고, 그 대신 봉토형식인 토지를 급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봉건 제도는 다음과 같은 점으로 해서 서양의 그것과는 다르다. 즉, 1)주종간의 관계가 서양처럼 쌍무 계약적 관계가 아니고, 종자의 충성 의무가 일방적으로 강요되었다. 2)당시의 무사 사회는 다분히 가부장적인 혈연 관계 위에 결합되고 있었다. 3)종자에 대한 토지 급여는 봉토적인 성질 미약했다. 4)토지를 급여받은 종자라 하지만, 바쿠후의 지배를 받지 않은 자가 많았다. 이상, 기술한 카마쿠라 시대의 봉건 제도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변천되어 갔으나, 역시 서양적인 봉건 제도와는 관계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