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벵골 분할, 보갑법,보로디노 싸움, 보르네오, 보수당의 이야기

**♥♥** 2019. 6. 24. 14:11

벵골 분할은 20세기 초엽 영국은 인도 총독 커어즌을 통하여 인도 제국의 지배를 강화해 갔다. 그 제국주의적 지배 방법의하나가 공포된 벵골분할안이다. 당시의 벵골은 현재의 오리사의 비하르 양주로 되어 있었고 인구는 약 8천명이나 되었다. 따라서 행정상의 분할은 이유 있다고 하겠으나, 커어즌의 안은 이슬람 교도가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동 벵골 아샘 주와, 힌두 교도인 벵골인이 겨우 3분의 1밖에 못 되는 벵골 주와의 분할을 계획했던 것이다. 이 안이 발표되자 벵골인 사이에 반대 운동이 일어나, 국민 회의파의 과격파를 선두로 하여 캘커타 지방을 중심으로, 분할인이 실시되는 10월을 기하여 격렬한 저항 운동을 벌였다. 영국측도 이에 못지 않게 탄압을 가하자, 소요는 점차 인도 각지로 파급되었다. 이 저항 운동은 인도 각지의 민족 운동 지도자들의 공명을 얻어, 국민 회의파 캘커타 대회에서 스와라지 자치 스와데시 국산품 장려 등을 포함하는 사항이 결의되게 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반대 운동에 직면하자, 이 분할안은 뉴우 델리에서 거행된 인도 제국 대관식 때 정식으로 폐기되었다. 그러나 이 때부터 벵골은 비하르, 오리사, 나그푸르등의 지방으로부터 분리하였다.

보갑법은 북송 때의 왕 안석의 신법의 하나. 그 실시목적은 처음에 제도 방법의 경찰적 기능에 길들이어 점차 민명화함으로써 병농 일치의 이상을 실현하고 모병의 폐를 고쳐서 군비를 절약하여 거란 서하의 침공에 대항하려고 한 것이다. 보갑 편성의 방법은 민호를 10가 50가 500가로 조직하고, 각기 보장 대보장 도보정 부보정을 두어 지도하였다. 또 주객호의 2정 있는 자 중 1정을 골라 보정으로 하였다. 보갑의 임무는 처음에는 대보마다 5명이 윤번으로 제도 방범을 행하게 하고, 규정을 정하여 상벌을 주었으며, 경기에 시행한 다음 점차 전국에 미치게 하였다. 보정에게 무사를 교습시키고 보갑의 관할을 사농시에게 병부로 이관시켰다. 카이평 부계의 대보장 2,800여명을 모아 이듬해 보정의 단교법을 정하고 카이펑 부계의 대보장을 교두로 하며 보정을 훈련시키고 점차 타로에도 확대시켰다. 오로의 의용을 고쳐 보갑으로서 부분적으로 민병제를 실현하였다. 그러나 보갑의 민병화에 대한 민중의 저항과 두법당의 반대로 중도에서 실패하고 보갑 단교는 폐지되었다. 그 후 이 법은 남송 명으로 이어 내려갔는데 청에서는 10호를 1패, 10패를 1갑, 10갑을 1보로 하는 보갑제를 전국적으로 시행하였다.

보로디노 싸움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원정 도중에 있었던 싸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 침입한 이래, 러시아는 초토 전술을 쓰면서 퇴각하여 기회를 엿보아 반격에 나섰다.  모스크바에서 150km떨어진 보러디노에서 쿠투르프 사령관이 거느리는 러시아 군은 최초의 반격을 시도ㅓ하여 나폴레옹 군의 전사자 3만을 헤아리는 승리를 거두어 프랑스 군을 격퇴시켰다.

보르네오는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중앙부에 위치하는 국내 최대의 도서. 세계 제3의 큰 섬이다. 그 이름은 보루네오의 주민 브루니족의 이름에 기원한다. 섬의 남부는 인도네시아에, 북부는 말레이지아 및 영령 브루네이에 귀속되어 있다.  중국에는 당대부터 알려져 종종 사신을 보내어, 그 문헌에는 발리 파라 등으로 기술되어 있다. 한편 자바와의 교통도 일찍부터 열리어 인도 문화를 받아들여 마자파히트 왕조의 성시에는 이에 복속하였다. 그러나 그후는 이슬람화하여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토왕이 할거하였다. 16세기에 들어와 유럽인이 내항하기 시작할 즈음 서북부 브루네오에는 블케라 왕이 나와 국세가 크게 신장하여 인근 제도에 패권을 잡았었다.  그러나 이 나라도 그 후는 쇠퇴하여 19세기에 들어와서는 내란이 계속되어 영국인 제임스 브루크의 힘으로 겨우 평정되었다.  브루크는 그 대상으로 부루네이 왕으로부터 사라와크를 할양받아 스스로 왕이 되어 사라와크 왕국을 일으켰다. 브루네이 왕은 다시 라부안 섬을 영국에 양도하고 사라와크와 함께 영국의 보호국이 되었다.  한편 남부에 있어서는 17세기초에 네덜란드인이 진출하기 시작하였고, 이어서 영국인도 진출하였으나 그들은 네덜란드인과의경쟁에 패하였다. 18세기에 들어와 네덜란드인은 반저르마신의 토왕과 체결하여 호추의 독점 거래권을 얻었고 또 인근 지방을 할양케 하였다. 19세기 들어와 네덜란드는 다시 다른 토왕도 압박하여 이를 직할령으로하고 네덜란드령 보르네오를 완성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이것은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한 주가 되었고, 한편 사라와크는 영국의 직할령이 되었다가 말리이지아 연방에 편입되었다.

보수당은 지주와 귀족의 이해를 대표하는 정당으로서 출현 17세기 이래 영국에는 토오리, 휘그 양당이 존재했으나, 산업 혁명에 의한 사회 변동과 상공업 계급의 신흥 및 자유주의 사상의 대두 등으로 양당내에는 분열이 생겨, 정당의 재편성이 있게 되었다. 그 때 토오링 당의 후신으로서 탄생한 것이 보수당이며, 휘그 당이ㅡ 후신으로서 생겨난 것이 자유당으로서, 가각 지주 귀족과 신흥 상공업 계급을 대표하였다. 또한 토오리 당을 당내의 자유주의파를 휘그 당에 보내고, 휘그 당내의 보수파를 받아들여 당을 재정 비하였다, 보수당의 신조를 두말할 것 없이 현존 질서의 유지이지만 이 말은 상당히 융통성이 있는 말로서, 노동당의 대두후에는 자유당의 프로그램을 대부분 흡수하였다. 보수당은 피일에 의해 토오리 당으로부터 재편성된 것이었으나, 곡물법 폐지를 둘러싸고 분열되어, 자유 무역파는 자유당에 흡수되고 남은 보수 무역파는 자유당에 흡수되고 남은 보수 무역파도 디즈레일리의 지도로 시대에 알맞게 개편되고, 토오리 메모크러시를 내걸고, 글래드스턴의 자유당과 2대 정당 정치를 전개시켜 나갔다. 그러나 글래드스턴의 아일랜드 자치법안을 계기로 해서 자유 통일당을 통합하여 통일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노동당의 진출에 의해 자유당이 몰락하게 되자, 그 보수적 분자를 흡수하여 노동당에 대립하여, 현대의 2대 정당 정치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독일:프로이센의회내의 보수주의 제파가 결성하였다. 헌법투쟁에 있어. 보수파는 홀로 비스마르크를 지지하여 의회의 예산 의정권을 부인하는 입장을 취하였는데, 비스마르크가 의회에 대하여 예산 지출의 사후 승인을 요구하여 일을 처리해 나가자, 이것을 계기로 지지 또는 반대의 2파로 나뉘었다. 지지파는 별도로 자유 보수 연합을 조직하였다. 문화투쟁에 있어서는 중앙당을 지지하였으나, 그 결과 또다시 분열되었다, 이와 같은 곡절 후에제 파를 모아 결성한 것이 보수당이다. 농업 보수 관세법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엘베 이동의 융커 세력뿐만 아니라, 전독일의 지주 특히 대지주의 지지를 얻어 국민 자유당에 대신하는 비스마르크 정권의 기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