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식민지제, 구양 순, 구품 관인법, 국공 합작의 이야기들
구 식민지제는 영국의 절대주의 시대의 중상주의 식민지 정책. 이 정책에서는 식민지 무역의 독점. 식민지 물자의 독점. 식민지 시장의 독점이라고 하는 3개의 목표를 추구했다. 즉크롬웰의 항해 조례로써 영국 본국과 식민지간의 무역에서 외국 선박을 배제하고, 해상 헌장 및 무역 촉진 조례로서 식민지의 주요 상품 및 식민지로 향하는 상품은 반드시 본국을 통과시킬 것을 규정하고, 식민지 무역을 영국 본국이 독점하며, 식민지 산업을 본국의 산업 및 무역에 저촉되지 않도록 할 뿐만 아니라, 본국의 산업에 대해 필요한 물자의 생산을 하도록 하고, 조례속에 나타나 있듯이. 이것을 본국이 독점하고 또 양모 공업의 급지나 철기 제조의 금지 등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본국의 상품과 경쟁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 물자의 생산을 억압 내지는 금지함으로써, 식민지를 본국 상품의 시장으로서 개발할 것 등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에도 그 자신의 발전의 흔적을 볼 수 있으며, 처음에는 무역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었으나, 마침내 생산이나 시장 문제가 취급되게 되었다. 중상주의는 상업 자본을 표면에 내세우고 있으나, 본질적으로는 산업 자본을 위한 정책이었으며, 따라서 그 식민 정책인 구식민지제, 역시, 처음에는 상업 자본이 그 담당자로서 활약하나, 이윽고 산업 자본을 위한 정책으로써의 본질을 드러내게 된다. 즉,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을 위해서는 식민지가 불가결한 요소 있으며, 자본주의 발전의 이 단계에 있어 식민지에 대한 요구가 무엇이었느냐를 나타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구양 순은 당대의 서가. 탐주 임상 사람. 자는 신본. 수의 양제를 섬기어 태상 박사가 되었고, 당의 고조가 즉위하자, 급사중으로 발탁되었다. 칙령을 받들어 예문유취 100권을 수찬하였다. 태종 때에 태자 솔경령이 되었고, 홍문관 학사를 겸하였으며, 발해남으로 봉함을 받고 은청광록대부를 수여받았다. 젊었을 때부터 서에 능하여 그 이름은 고구려에까지 알려졌다. 미백 전 예 해 행 장초 초의 서체를 자유로이 썼으나, 그 중에도 해서가 가장 뛰어났다. 그 서풍은 왕희지 이래의 정통파의 흐름을 받은데다 새 시대의 정신을 담아서 청경 초발 그 유례가 없는 전형미를 창작하여 후세에 길이해법의 모범이 되었다. 우 세남 저 수량과 함께 초당의 삼대가로 추앙되고 있다. 현존하는 서적중에서 구성궁 예천명이 가장 유명하다. 이는 구성궁의 감천을 기리어 위 징이 찬한 글을 비에 새긴 것으로서, 원석이 지금의 싼시 성 린유 현에 있다.
구품 관인법은 삼국에서부터 수조까지 행해졌던 관리 등용법. 송이후는 구품 증정 제조라고도 일컬었다. 위의 문제가 한을 빼앗기 직전 위의 상서 진 군이 건의하여 이 법을 세웠다. 그 목적은 한 정부를 해체하였을때, 그 관리를 재덕에 따라 위 정부에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우선 중앙 정부에 구품 관제를 세워 한대의 질록에 따른 등급 대신에 1품부터 9품에 이르는 품계에 의하여 조정의 관위를 등급 매긴다. 다음에 지방의 군에 중정이라는 직을 두어, 그 지방 출신의 현임 관리나 학문 있는 자체의 언행을 살펴 그 재덕에 따라 역시 1품에서 9품으로 나누어 이를 향품이라고 일컬었다. 이 향품의 9등급에 따라 적당한 관위에 등용하는 것이 즉 구품 관인법이다. 한위의 혁명이 실현된 뒤에도 이 법이 남아서 주로 지방의 귀족 자체가 처음으로 임관되는 이른바 기가할 때에 적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 때 향품이 1품인 자는 5품관부터 기가하도록 4품을낮춘 관위에서출발하여 향품과 같은 등급의 관품까지 승진시키는 것이 관례였다. 이 법의 취지는 원래는 개인의 재덕에 따라서 조정의 관위로 등용하는 것을 목적하였으나, 중정의 직에 피임되는 자는 대개 지방의 유력자여서 향품을 수여할 때 동료가 중앙의 대관과 짜고, 유력자의 자제에게 후하게 하고 무력자의 자제에게 박하게 하는 폐단이 일어났다. 진의 유의가 상품에 한문 없고 하품에 세족 없다고 한 것은 유명하며, 당시 발흥하기 시작한 지주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이 법은 이후 육조에서 행해진 귀족 제도를 성립시키는 데에 소용되었다. 이 귀족 제도는 남조의 송 제 시대를 전성기로 하여 왕씨 사씨를 정점으로 하는 기족이 특권을 갖고, 일류 귀족 자재ㅔ는 비서랑에서 기가하고 이에 버금하는 것은 저작좌랑이었다. 양의 무제는 이같은 귀족의 특권에 제한을 가하는 뜻에서 학관에서 행하는 시험에 의한 기가를 인정함으로써, 후세 과거의 선구를 이루었다. 구를 관인법은 북조에도 채용되었으나, 북위의 독자적인 귀족 제도에 걸리어 안정된 체제를 만들기에 이르지 못하였다. 북위가 분열한 후 북주는 군벌 귀족제를 채용하고, 북제는 시험 제도를 서서히 도입하였으나, 수의 문제가 서자 북제의 제도는 더욱 강화되어, 중정의 직무를 정지하고, 필시는 거의 동시에 과거 제도가 창설되었다.
국공 합작은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이 제휴한 통일 전선. 제1차 합작과 제2차 합작이 있다. 제1차:국민당 제1회 전국 대표 대회에서 행해졌는데, 그전 해에 소련 대표 요페가 쑨 원과 만나 국민당과 공산당과의 제휴가 필요함을 강조한데 대하여, 쑨 원도 공산당의 국민당 가입을 인정하기로 하고, 연소 용공 부조 농공의 3대 정책을 결정하여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당의 지도권 장악이 목적이었던 공산당은, 그것이 여의치 않음을 깨닫자, 국민당 좌과를 꾀어 우한 정부를 세웠고, 이어서 세워진 난징 정부와 대립하였다. 그러나 우한정부도 점점 반공적으로 기울어져 국민당 좌파와 공산당은 결별함으로써 제1차 합작은 끝나 버렸다.
제2차:그 후, 국공간에는 10여 년간 항쟁이 계속되고, 한편 일본이 만주 사변 이래 화북 침략을 시작하자 중국은 안팎으로 시끄럽던 중 시안 사건이 일어나고 그 결과, 국민당은 내전 정지 대일 항전을 결의하게되었다, 루꼬우챠오 사건 직후, 루산에서 장 제스 마오쩌뚱 회담이 얼렸고, 이어 중공은 소비에트 지구의 해소. 공산군의 개편 등 항일 운동을 위해 국민당과의 융화책을 취하였으며, 국민당은 정식으로 국공 내전의 종말을 선포하여 합작이 실현되었다. 이리하여 홍군은 제8로 개편되어 국민 정부로부터 군비 군수품을 받아 방비 구역을 배정받았으나, 대일 전쟁이 진전됨에 따라 공산당은 국민 정부의 명령을 듣지 않고 자당의 세력 확장을 꾀하였으므로 도리어 충돌하게 되었고,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고는 대일 전쟁을 미국에 맡긴 형태로서 국 공의 반목은 격화되고 이 내전은 전후로 계속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