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계몽루소, 미국 대통령루우스벨트,프랑스국왕루이16세,독일 루터 종교개혁
루소는 프랑스의 계몽주의자, 철학자. 작가 스위스의 시계공의 아들로 제네바에서 출생. 출생 며칠 후에 모친을 잃고, 다른 계몽 사상가와는 달리 정규 교육은 전연 받지 못했으나, 이것이 그의 사상 형성에 커다란 의미를 갖게 되었다. 10세기경부터 여러 나라를 방랑하고 16세때에 사부와에서 바랑 부인을 만나 그녀의 주선으로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다시 부인에게 돌아와서 얼마 동안 그녀와의 관계가 계속되나, 그녀와 헤어져, 파리로 나가 문필 생활을 시작하였다. 디드로 등의 철학자들과 친분을 자고 백과 전서에 투고를 시작, 디종의 아카데미 현상 논문에 응모한 학문 및 예술론이 당선되어 문명을 날렸다. 계속하여 인간 불평등 기원론 정치 경제론 등을 쓰고, 독자적인 사회관 자연관을 수립했다. 몸모랑시에 있는 에피네 부인의 별장으로 이주하고, 다시 뤽상부르 원수의 영지로 옮겼는데, 이 무렵부터 디드로 등의 그루우프와 헤어졌다. 그 후 신에로이즈 사회 계약론 에밀 등의 중요한 저작을 연달아 출판, 최후의 저서에서 전개한 자연 신교가 교통 법원에서 금지되고, 이후 각국을 편력, 파리로 돌아와 죽을 때까지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고백론, 고독한 생활을 보냈다. 고백론, 고독한 산보의 몽상 등은 이 시기에 씌어진 것이다. 그는 자연으로 돌아가라를 신조로 하여, 자연은 인간을 자유롭고 선량하고, 행복하게 만들었으나, 문명과 사회가 인간을 부자유와 사악과 불행에 빠뜨렸다고 단정하고, 교육의 근본 정신은 자연인을 길러내는 데에 있다고 주장했다. 또 사회를 자연 상태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부르짖는 데서 사회계약설을 주창하여, 로크보다도 일보 전진한 주권 재민론을 견지하였다. 그 사상은 백과 전서파처럼 부르조아지의 이념으로 서의 성격을 갖고 있으나, 그의 경우는 그 하층, 즉 농민 소시민의 의식을 대표하고 있었다. 또 감정적 해방의 주장에 낭만주의의 원천이 인정된다.
루우스벨트는 미국 제32대 대통령. 뉴우요오크 주 하이드 파아크에서 출생. 윌슨 대통령 아래서 해군 차관을 지냈으며, 대통령 선거 때는 민주당 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낙선되었다. 뉴우요오크 주지사에 당선되어 공공 복지, 공공 사업 통제, 농민 구제, 노년 연금 등의 제 개혁을 실행하였다.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는 비상 입법으로서 공황을 완화함과 동시에 중소 상공업자를 보호하기 위한 항구적 정책을 실시하려고 뉴우딜 정책의 전개를 시도하였다. 또 전국 산업 부흥법 및 농업 조정법의 입법에 의해 연방 정부는 강력한 산업 통제를 하였으며, 테네시 계곡 개발 공사에 의해 민간 공공 사업에 도전함과 동시에 사회 보장 제도를 확장하여 노동자의 복지증진에 노력했다. 대통령에 재선되었으며 또한 선린 외교 정책을 주장하여 서반구와의 우호 관계를 증진시켰다. 유럽에 있어서의 전체주의의 침략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국가의 방위에 노력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뉴우딜의 속행과 그의 외교 정책 추진을 불가결하게 했으므로 대통령 선거에서 미국의 전통을 깨뜨리고 3선되었다. 처어칠과 대서양성에서 회담하여 대서양 현장을 만들었으며,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참전하게 되자 전쟁 수행에 노력하고, 선거에서 4선 되었다. 그간 카사블랑크, 카이로, 테헤란, 얄타 등에서 열강 지도자와 수차에 걸쳐 회담하였으며, 전쟁 수행을 용이하게 함과 동시에, 전후의 세계 문제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그는 인류의 자유를 강조하였으며, 국제 연합이 탄생하기 2주일 전에 아깝게도 급서하여 트루만이 그의 정책을 계승하였다.
루이16세는 프랑스 국왕. 루이 15세의 손자.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양트와네트와 결혼. 성격은 우유부단하고, 수렵과 자물쇠를 만드는 데 몰두하여, 국왕으로서의 적성이 결여되어. 이후 닥쳐온 비운의 최대 원인이 되었다. 튀르고, 말제르브 등을 등용하여, 구제도의 모순 해결,, 재정 위기를 타개하도록 하였으나, 궁정 및 특권 신분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이어 네케를 기용하였으나, 아메리카 독립 혁명에 개입하여 국비를 낭비함으로써 재정은 더욱 곤란해졌다. 이후 칼론, 브리엔을 기용하였으나, 재정은 악화될 뿐 개혁은 특권 신분의 반항으로 실현할 수가 없었고, 삼부회소집을 결정. 재차 네케르를 기용하였다. 삼부회가 국민 의회로 성장하여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이 높아지자, 군대에 의해 의회를 탄압코자 책동하였다가, 이것이 도리어 바스티유 공격을 초래하였고, 이 같은 시민의 봉기에 굴복하였다. 이후 소위 체제에 입각한 입헌 왕정에의 움직임에 대하여, 자신의 무정견과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를 중심으로 하는 궁정의 압력으로 신체제에 저항하면서도 일보일보 양보하였으며, 한편 미라보, 라파예트, 이어 바르나브 등의 푀이양 파의 손을 잡고 권력의 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여, 일가와 함께 국외로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실패, 입헌 왕정을 기조로 한 헌법의 승인을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후에도 초지를 버리지 못하고, 특히 지롱드 당의 전쟁 정책에 동조하였으나 패전으로 인한 외국군의 간섭을 받았다. 선전후 절대 왕정의 회복을 목표로 전쟁 추진을 계속 사보타아지하다가 결국 국민의 분노를 사게 되어 사건으로 왕정은 전복되고 탕플 감옥에 유패되었으며, 국민 공회의 투표 결과 반역자로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루터는 독일의 종교 개혁자. 작센의 아이슬렌 태생.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법률학을 공부하였으나, 아우구스티누스 파 수도원에 들어갔다. 신학 박사가 되었고,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가 되었다. 카톨릭 교의에 대한 의문은 수도원 생활 중에 싹텄으며, 신앙만에 의한 의인에의 확신에 접근하고 있었다. 테젤에게 인솔된 속죄부 판매의 일행이 작선에 왔을 때에, 그의 종교적 확신에서 95개 조항의 항의문을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내붙인 것은 독일 민중들에게 곧 커다른 영향을 불러일으켜,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로마 교황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교회측 대표인 에크와의 라이프찌히 토론에서 교황 종교회의의 권위를 부정하고, 교황의 파문장을 대중 앞에서 소각하여 불퇴전의 결의를 표명하였다. 또 같은 해에 독일 국민의 크리스트교 귀족에게 드림 교회으 바빌론 유수의 서곡 크리스트 교도의 자유를 저술하여, 의인론과 성서주의 만인 사제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개혁 이념을 표명하였다. 카알5세에 의해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소신을 철회할 것을 강요당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였으므로 국법의 보호권 밖으로 놓여져, 귀로에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헌공을 수행, 그의 보호로 바르크부르크 성에 칩거하여 성서의 독역을 완성하였다. 독일 농민 전쟁이 일어나자, 처음에는 영주 제후와 농민과의조정에 노력하였으나, 폭력화하자 제후의 무력적 진압을 지지하여 개혁 운동에 대한 농민의 지지를 잃었다. 이는 그의 정신주의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확립을 제후들의 세력에 기대한 입장 때문이었으나, 영방 교회제 확립에의 개혁 운동의 선회를 결정지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