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제도, 교단, 교황, 구개국 조약, 구빈정책, 구석기 시대 옛 이야기
교계제도는 그리이스어 히에라르키아에서 온 말로서 신성한 자의지배라는 뜻. 크리스트교에서 신성한 자란 교직자를 말하며, 따라서 교직자가 사회의 지배적 지위를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본연의 자세를 말한다. 이는 로마 교회내에서 교황을 장으로 하여 상하의 교직자가 만드는 단계적인 질서가 된다. 이것은 크리스트교 본래의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점차적으로 이룩된 역사적 형성물이다. 속인으로부터의 교직자의 분화는 빨라서 바울 시대부터 볼 수 있는데, 교직자 사이에는 집사 장로 등이 성립되기는 2세기부터이다. 크리스트교 사회는 교회의 지도하에서 교황을 그 수장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론을 명확히 주창한 사람은 5세기의 겔라시우스 1세이다. 그러나 그 실현은 중세 성기에 비로소 가능해졌다. 현실에 있어서의 전형은 인노켄티우스 3세 시대이다. 이론은 보니파티우스 8세의 교회 통일론에 가장 뚜렷이 나타나 있다. 당시의 교황은 국왕을 능가한 권력을 가졌다. 교황청에서 교황 다음 가는유력자는 추기경으로, 그들이 구성하는 추기경 회의는 교황을 선출하는 모체이다. 지방조직에서는 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주교구를 단위로 한다. 주교 중에서 유력한자는 대주교로서 다른 주교를 감독한다. 주교회에는 참사회가 있으며, 이는 교황에 대한 추기경 회의와 같은 관계를 주교에 대하여 갖는다. 최하단은 교구 사제이며, 도시는 몇 개의 교구로 분할되며, 농촌에서는 대체로 한 촌락이 교구가 된다.
교단은 수도원의 조직적인 단체. 유럽에서 최초의 교단 성립은 6세기의 베네딕투스부터인데. 그가 정한 베네딕투스 계율은 공통으로 지키는 수도원 조직이 생겼다. 10세기초 브레타뉴에 세워진 클뤼니 수도원에서 일어난 개혁 운동이 각지로 전파되어 클뤼니 교단이 생겼다. 이는 클뤼니 수도원장의 권력이 강하고 중앙 집권적인 성격을 갖고 있음을 말해 준다. 그러나 유럽에서 새로운 교단이 많이 생겨난 것은 11, 2세기의 일이다. 이것은 클뤼니 개혁 운동에 발단한 유럽 종교 정신의 각성에 의해서였다. 로베르투스가 세운 시토 교단 노르베르트의 프레몽트레교단, 브루노의 샤르트퇴즈 교단, 스테판이 세운그라몽 교단 등이 그 주요한 것이다. 이들 교단의 이름은 모두 그 지명에서 딴 것으로, 이것이 프랑스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며, 당시의 프랑스가 중교 운동의 중심지였음을 말해 준다, 이 중에서도 시토 파가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를 배출한 것이 가장 유명하며, 또 가장 강대해지는데, 그것은 13세기초의 일이다. 그후 이에 대신하여 탁발 교단이 성해지는데 이것의 도시의 발전, 시민 정신의 대두라는 사회적 변화를 따른 것이다. 농촌적이며 귀족과 연관되는 종전의 교단에 대하여, 탁발 교단은 도시로 나와서 민중에게 접근하고 있다. 탁발 교단은 프란체스코 교단의 도미니쿠스 교단을 중심으로 여기에 카르멜 산 교단과 아우구스티누스 계율단이 참가하고 있다. 또 근대초에 프로테스탄트가 성립될 때에 반동 종교 개혁의 일파로서 에스파니아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창립한 예수회도 교단 운동의 최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수도원은 원래 금욕주의를 원리로 하는 것인데, 그것이 사회적 조직을 갖는다는 것은 일견 불가해한 듯하나, 이것이 유럽수도원의 문화적 역사적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이 교단 조직으로써 새로운 종교 정신을 전도하고 로마 교회의 한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수도원의 속화의 타락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유럽 수도원의 역사는 고단의 성립 발전에 따르는 타락, 이에 대하여 경건한 신앙과 엄중한 금욕주의에 바탕을 둔 혁신 운동과 그에 따르는 새로운 교단의 성립이라는 과정을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교단의 성립은 항상 교황권 발전의 기초가 되었으며, 교단을 발생하게 하는 종교 정신은 교회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었다.
교황은 로마 카톨릭 교회의 최고 최고 지배자. 로마 주교는 로마 제국의 옛 서울인 로마에 주재하여 사도 베드로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계승한 지상에 있어서의 크리스트의 대리자이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수장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여 교황이라 불려진다. 특히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레오 3세. 그레고리우스 1세 등 역대 교황은 로마 시의 치안 유지나 미개 민족의 교화에 노력하였고, 또 프랑크 왕과 결탁하여 서방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어, 카일대제에게 서로마 황제의 관을 줄 정도로 권위가 높아졌다. 카롤링 왕조와 이탈리아 왕가가 단결된 후 무력적 후원자를 잃어 그 지위가 약화되고, 10세기에는 신성로마 황제의 간섭을 받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11세기에 그레고리우스 7세가 나와 교회의 숙정, 교황권의 회복에 노력하면서, 이후 역대 교황은 교황령 및 십일세의 막대한 수입을 기초로, 황제 파의제후를 조정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잡고, 십자군까지 일으켰다. 교황권의 극성은 독일, 프랑스, 영국의 군주를 제압한 인노켄티우스 3세를 절정으로 하여 이후 점차 약화하였고, 14세기에는 프랑스 왕에 의해 아미농으로 옮겨진 후 로마, 아비농 두 교황의 대립이 생겼으며, 통일 후에도 교황의 지위가 떨어져, 세속적 지배권은 교황령에만 미치게 되었다. 다시 종교 개혁에 의해 그의 정신적 권위를 더욱 떨어졌고, 현재는 교황령도 교황청 지구에 한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도 3억이 넘는 신도를 배경으로 하는 교황의 권위는 무시할 수 있다.
구개국 조약은 워싱턴 회의에서 미국, 벨기에, 중국, 프랑스,영국, 이탈리아, 일본, 네덜란드, 포르투갈의 9개국이 극동 문제에 관하여 체결한 조약. 워싱턴에서 군비 축소에 관한 회의가 개최되어, 군축 문제와 불가분한 태평양 및 국동에 관한 행정도 토의되었다. 특히 중국에 관해서는 미국으로부터 루우트 4원칙 곧, 1. 중국의 주권 영토의 보존, 2 유력한 중국 정부수립의 완성. 3. 기회 균등주의의 수립. 4. 세력 범위 설정의 부인이라는 결의안이 제출되어, 이것이 워싱턴 회의의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9개국 조약은 이 루우트 4원칙을 골자로 하여 성립된 것이며, 이 조약에 의해 열국은 중국의 주권과 독립, 행정적 및 영토적 보전의 존중을 약속하고, 문호 개방 기회 균등의 원칙을 승인하였다. 이 조약의 성립은, 미국이 대 중국 21개조요구로부터 시작되는 일본의 중국 침략에 대하여 반격을 가한 것이며, 또한 헤이의 문호 개방 산언 이래의 전통적인 극동 정책을 열국에게 승인시키는 데 성공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조약의 약점은 중국에 관한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중국 전혀 무시한 것이며, 중국이 요구하고 있던 불평등 조약의 개정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구빈정책은 무릇 역사상 어떠한 국가 사회에서도 빈민은 존재하였으며, 또 그것이 너무 증대하면 공공의 안녕을 위험하고 전체의 복지를 깨뜨리는 요인이 되기 때문에, 이것을 구제하는 공적인 제도. 조직은 아주 옛날부터 있었다. 일찌기 함무라비 법전 속에서 곤궁자에 대한 특별한 조치가 나타나는데, 아테네에서는 명확히 국가적 구제의 형태가 취해졌으며, 로마에서도 공화정 말기 이후 빈곤한 시민의 구제가 중요한 과제가 되어 있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붕괴에 따라 국가적 구빈 제도는 미약해졌으나, 중세에는 로마 교회가 그 과업을 계승하게 되어 빈민에의 개인적 자선을 영혼 구제의 한 수단으로서 장려함과 동시에, 교회 수입의 일부가 반드시 거기에 소비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온 서유럽에 걸친 조직을 가진 수도원이 문전에서 빈민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고, 숙소를 제공함, 의술을 베풀어 주고, 고아를 수용하는 등의 자선 사업을 하였다. 그러나, 중세 사회에서는 그 본질에 있어서 장원 및 길드라는 공동체 조직이 곤궁자의 발생을 방지하고, 또 그 구제를 맡는다는 책임을 지고 있었다. 따라서 14세기 이후의 장원적 질서의 해체. 농민의 분해는 빈민의 수를 급속히 증대시켜, 사회 불안의 커다른 원인이 되었다. 더우기 교회나 수도원은 점차 그 구제 기능을 상실하였으므로, 각국은 절대주의 체제가 정비됨에 따라 국가 권력의 감독을 받는 구빈 조직의 성립이 촉진되었다. 그 시초는 부랑인 처벌이라는 경찰적 조치에 중점을 두었으나, 이윽고 노동 불능자를 보호하고 실직자에게 직업을 주는 보호 조치가 취해진다. 루터, 쯔븐길리, 캔빈 등은 모두 신시대에 있어서의 구빈의 본연의 자세를 설파하고, 비베스의 개혁안, 이프로 시의 시책등이 유명하지만 그것들을 종합하고 섭취한 끝에 자본주의 경제의 보조에 호응하는 공적 조직을 수차에 걸친 법령, 곧 구빈법으로서 완성시켜 간 것이 영국이다. 프랑스나 독일에서는 16세기가 되어서도 아직도 많은 종교 기관에의존했는데, 점차 국가에 의한 감독 간섭이 강하게 나타나며, 특히 19세기 이후가 현저하다. 그러나 20세기 되면서 영국을 비롯하여 온 서유럽에 걸쳐서 빈곤 발생의 근원을 막는 정책, 곧 사회 보장 제도가 실시되어 구빈 문제는 거의 해소되어 가고 있다.
구석기 시대는 지질 연대이 홍적새에 해당되며, 중, 신석기 시대에 선행하여 인류가 최초의 문화를 낳은 시대로서, 수십만년에 걸친다. 도구로서는 타제 석기를 특징으로 하고, 경제적으로는 수렵 어로 채집의 단계이며 차일드는 민족학상의 몽매 시대를 이것과 같이 취급했다. 이런 의미에서는 중석기 시대도 구석기 시대의 말기로서 취급해야 하나,여기서는 본래의 구석기 시대에 대하여 유럽을 중심으로, 전기 후기로 나누어 취급한다. 전기:이 때의 지중해는 몇 개의 호수로 나뉘어져 유럽과 아프리카는 접속되어 있었다고 생각된다. 인류 최초의 도구는 돌덩어리 나뭇조각이라고 생각되는데, 명확히 유형화되기는 석핵 석기 문화 박편 석기 문화가 나타나고부터다 전자는 정형화하여 악부형 석기가 되는데, 기원은 아프리카이며 서유럽, 남인도의 고은 습지대에 분포하고, 후자는 라인 북동쪽의 한랭 건조 지대에 분포한다. 전자는 아브빌 문화, 아쉴 문화에 의하여 대표되며, 후자는 클랙튼, 르 발르와 문화에 의하여 대표된다. 이들의 시대에는 유럽에서는 아직도 화식이 알려지지 않고, 문화의 보조는 완만했다. 제3간빙기의 말기에서 제4빙하기에 걸쳐서 전기한 여러 문화의 담당자와 같은 고생 인류이기는 하나, 새로운 네안데르탈인이 활동하여 무스티에 문화를 낳았다. 이 기간에는 박편 석기가 우세하였는데, 악부형 석기도 사용되고 불의 이용, 매장도 행해졌다. 후기:오리냐크, 솔튀트레, 마들렌의 여러 문화에 의하여 대표된다. 담당자는 크로마뇽인 기타에 의하여 대표되는 현생 인류이다. 박편석기에 유래되는 칼날 석이ㅢ 이용이 시종 우세하며, 점차 깍은 그릇 돌칼 돌송곳 등이 만들어지고, 그 밖에 뼈 뿔 상의 제품이 특히 발달했다. 북아프리카나 에스파니아에서는 활도 나타나며, 수렵법은 더욱 진보되었다. 그들은 계절에 따라 주거를 옮기고 간단한 가옥을 만들며 매장시에는 음식물 기구 장신구등을 부장했다. 이 수렵 채집 문화의 정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동굴 회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