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메르그, 둔전제, 드골, 드레퓌스 사건, 두보랸스트보 사람들의 이야기
두메르그는 프랑스의 정치가, 대통령. 처음 님에서 변호사를 개업하고, 코친차이나 식민 판사. 알제리 치안 판사를 거쳐 하원 의원에 당선. 급진 사회당에 소속되었다. 식민상, 하원 부의장, 상무상, 문교상을 역임하였고, 상원 의원이 된 후에는 민주 좌익 그루우프의 증진으로서 활약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전에 수상에 취임했었으나 3년 병역제 군사 예산 등의 난문제로 인하여 한 일 없이 물러났다. 대전 중에는 식민상, 전후 상원 의장이 되고, 밀랑의 뒤를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스타비스키 사건에 뒤이온 정국 혼란의 수습에 나섰으나, 우경한 헌법 개정안이 급진 사회당의 지지를 잃어 사직하였다.
둔전제는 중국에 있어서 둔전은 국가가 일정한 지방에 집단적으로 경작자를 설정하여 새 영토 혹은 관유지를 경작케 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진 한 이후 역대왕조가 시행하였던 것으로, 국가의 방위 혹은 재정상의 직접적인 재원 확보하는 중요 정책으로 실시되었다. 이러한 둔전은 군인이 경작하는 경우인 군둔과 민간이 경작하는 민둔으로 분류되었다. 둔전의 시초는 시황제가 오르도스 방면에 설치한 것이라고 하나, 한 무제의 장예이, 뚠황 지방에 설치한 것을 시초로 보는 설도 있다. 후한에 이르러 서역방역의 둔전은 단속적으로 존재하였으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이 때부터 둔전이 내부 지역에 설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3국 시대에 와서 위의 조 조는 백성을 모집하여 주인 없는 황무지를 경작시킨 민둔을 주로 설치했고, 군둔은 대오 대촉의 전선 기지로서, 중요한 지방인 화이허 강 및 위수 상류에 설치했다. 이 군둔은 영구 병역 의무자인 병호 및 일반민에서 징발된 병사로서 50인을 1둔으로하고, 둔마다 사마가 설치되고, 그 수확은 그 지방의 군량으로 하였다. 위의 중기 이후부터 둔전은 전농관에 의하여 사유지화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국가 재정에 대한 의의가 박약해져 갔다. 진에 와서는 그 강제적 성격을 완화하여, 점전과전법을 실시했다. 그 중 과전법은 둔전법을 이어받은 것이다. 당대에 와서 균전법의 시행과 병행하여 실시되었으며, 변경의 둔전은 일반적으로 군둔이었으나, 내지의 둔전은 민둔이 많았다. 당말에 둔전은 영전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는데, 농민을 고용하여 경작시켰으므로 둔전의 성격은 희박했다. 북송시대의 영전은 북방 각지에서 행하여졌는데, 특히 일종의 민병인 궁전수에 의한 것이 유명하다. 남송 시대에는 영전이 더욱 더 발달하여 군량 ㅈ달에 큰 구실을 하였다. 명대의 둔전은 군둔 민둔 상둔의 3종으로 나누어졌다. 특히 명조는 위소제도에 의한 병농 일치의 정책을 시행하였기 때문에, 둔전의 맡은 역할은 중요하였다. 청대에 와서 둔전은 점차적으로 민전화되어 갔다.
드골은 프랑스의 군인. 정치가 제1차 세계 대전에 종군하였고, 전후에는 폴란드에서 소비에트에 대한 반혁명 운동에 참가, 귀국하였다. 전술 이론가로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내었으며, 레노 내각의 국방 겸 육군 차관이 되었다. 페탱 내각이 독일에 굴복하자, 같은 해 런던에서 프랑스 전국민에게 항전의 계속을 호소하고, 자유 프랑스 전국 위원회를 결성, 국내의 레지스탕스 운동과 호응하여 대독 항전을 추진하였다. 알제리의 국민 해방 프랑스 위원회 위원장이 되었고, 임시 정부 수석으로서 12월 프 소 우호 조약을 체결하였다. 프랑스 국민 연합을 조직하여 우익적 정치 활동을 계속하다가 은퇴하였다. 알제리 주둔군과 우익 콜롱의 반풀린랭 정부 폭동 발발 후, 정권담당의 의사를 표명, 정부 총사직 후 6월에 수상으로 취임하였다. 재선되고, 상원 및 지방 제도의 개혁이 관계된 국민 투표에 패하여 고향에 은퇴 중 심장 마비로 서거하였다. 전술 관계의 저작 외에 회고록이 있다.
드레퓌스 사건은 유다인 사관 알프레드 드레퀴스는 재판 문제에서 발단하여, 프랑스 제3공화정에 증대한 정치적 위기를 초래하였던 사건. 참모 본부 포병 대위 드레퓌스가 대독 간첩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비공개 군법 회의에 의해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 유형에 처해졌다. 그 후 첩보부는 드레퀴스 무죄의 확증을 파악하였으나, 군 상층부는 진상 발표를 거부, 사건을 암장하려 하였다. 드레퓌스의 결백을 믿어 재심 요구 운동을 벌이고 있던 가족도 진상을 탐지하고, 진범인 에스테라지 소령을 고발, 사건은 표면화되었다. 사건의 재연을 겁내어 재판의 정당성을 완강하게 주장한 군부는 반 유다주의의 풍조와 군국주의의 기운데 편승하여, 형식적인 신문과 재판을 거쳐 에스테라지를 무죄 석방하였다. 그러나 졸라가 이 부정과 허위에 대하여, 대통령과 군부를 탄핵하는 공개장을 오로르지에 발표하게 되자, 세론은 비등하여 전 프랑스는 드레퓌스의 재심파와 반드레퓌스 파로 분열하였다. 전자에는 자유주의적 지식인, 사회당, 급진당이 참가하여 인권 옹호 군국주의 반대 공화정 옹호의 슬로우건하에 인권 동맹을 결성하였고, 후자에는 국수주의자 우익 정치가 군 교회가 집결하여 반 유다 국가의 질서 군대의 영광을 절규하며, 프랑스 조국 동맹을 결성함으로써 대립하였다. 이리하여 사태는 한 사관의 석방 문제를 넘어 정치 투쟁으로까지 발전한 것이다. 대립은 격화하여, 반드레퓌스파는 쿠데타까지 기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재심파의 승리를 끝나서 대통령의 특사로 드레퓌스는 석방되었다. 그 결과, 좌파제 당파의 대동 단결이 촉진되어 군부는 숙정되고, 반대파와 교회의 세력은 크게 후퇴하여 제3공화정의 기초가 굳어졌다.
두보랸스트보는 모스크바 공국에 의한 러시아 국가 통일의 과정에서 출현한 지주적 귀족 계급 또는 사족 계급. 사족이란 원래 궁정에서 봉사하던 종신을 말하는 것으로, 뒤에 모스크바에 대공의 군대에 복무하고, 포메스티에를 받은 모든 소토지소유자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이들은 대공과 대귀족 계급과의 투쟁에 있어서는 이해를 같이하는 대공을 지지하였고, 이반 3세 시대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세력이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리고 이반 4세 시대에는 오프리치니나 제도를 실시하여 대귀족 계급에게 최종적인 타격을 주었다. 대공은 그들의 경제적 이익을 보호해 주고, 농노주적 특권을 보증하는 등 포메스티에의 확대를 꾀하였으며, 그들의 원조에 의해 중앙집권 국가를 수립하였다. 대귀족 계급의 최후의 반격이 있었던 혼란 시대가 지난 후, 승리를 획득한 이 계급은 로마노프 왕가를 옹립하여 그 지배권을 확립하고, 일시적으로 영유한 포메스티에를 세습화하였으며, 또 농노제를 확대 강화시켰다. 표트르 대제의 장자 상속제의 칙령으로, 봉사 의무가 부과되었지만, 토지의 소유권을 완전히 획득하였다. 봉사 의무가 해제되고, 에카테리나 2세때에는 특허장에 의해서 많은 특권을 얻었다. 19세기부터는 자본주의적 경제 체제의 발전과 더불어, 점차 그 봉건적 농노제적 체제가 약화되었으나, 농노 해방 후에도 의연히 짜아리즘의 지주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