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연방 공화국, 독점 자본주의, 독재 권력 장악등의 형태
독일 연방 공화국은 제2차 세계 대전 후의 서부 독일에 성립된 국가. 통화 개혁을 결정적 계기로 하여 독일은 분열, 미국, 프랑스, 영국 통치 지역에서 탄생하여, 동독과 대립하고 있다. 의회에 의해 독일 연방 공화국 기본법이 성립, 3개월 후 제1회 총선거를 시행하여 기독교 민주당 자유 민주당 독일당의 보수 연립 내각이 성립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호이스, 수상은 아데나위였다. 지방 분권적 색채가 짙다. 군정이 끝나고, 재군비를 인정받고, 완전히 주권을 회복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동안 경제적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는 한편, 소련과 불가침 조약의 체결을 기점으로 그 해 폴란드와 국경선 문제에 조인하고,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와도 수교에 합의, 조인하였다. 또한 동독과도 회담을 시작하여 양독 기본 조약이 정식 발효되었으며, 그 해 UN 총회에서 동 서독이 함께 UN에 가입되었다. 수도는 본이다.
독점 자본은 초기 독점:초기 자본주의에 있어 상업 고리대 자본이 종래의 생산 유통의 제 조건을 유지하기 위해 행한 독점. 그 태반은, 특히 영국에서는 절대주의 권력에 의해 특권으로서 부여 되었다. 근본적으로는 전기적 자본은 절대 왕정의 경제적 기반이며, 표면적으로는 특허장을 부여함으로써 왕실 재정의 궁핍을 구체할 수 있었다는데에 근거한다. 상업 독점과 산업독점으로 대별되며, 전자는 일찌기 남 독일의 대 라벤스부르크회사, 포르투갈의 동인도 무역 등에서 볼 수 있으나, 영국에서는 특히 회사의 설립으로 나타났다. 산업 독점이란 어떤 종류의 상품의 생산과 판매에 관한 독점을 말하는데, 영국의 예를 들면 16세기말에 유리 전분 소금 종이 화약 등 광범위한 종류가 있었으며, 그 중에는 외국 기술 도입을 목적으로 한 것도 있었다. 특히 엘리자베드 치세중에 설립된 두 개의 광산 회사:마인즈 로열 회사의 미너럴 앤드 배터리 위는 남독일의 일부 자본가와 영국 토착의 전기적 자본과의 합자에 의해 성립한 전형적인 독점 기업이었다. 이것은 산업 상업 어느 면에서도 처음에는 원시 축적적 역할을 수행하여 자본제 생산에 자극을 주었고, 미숙한 산업 자본의 발달을 촉진시키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과도적 현상에 불과했으며, 초기의 독점이 의존하는 지반이 전기적 자본인 이상, 산업 자본의 성장이 이를 위협하게 되니, 자본제 생산을 억제하여 봉건적 기초 과정의 유지를 기도하게 된다. 그 결과 전기적 자본과 산업 자본과의 대립이 독점 대 자유의 형태를 취하여 나타나게 된다. 영국에서는 엘리자베드 말기 이후 스튜어트 조를 통하여, 의회를 중심으로 독점 논쟁이 전개되어, 청교도 혁명의 길을 터놓게 되었다. 독점 자본주의:19세기 후반에 자유 경쟁의 원칙 위에 선 자본주의의 발전이 고도화되자, 생산과 자본의 집적 집중이 촉진되어, 대규모의 기업은 생산과 시장을 지배하기 위해 카르텔 트리스트, 콘쩨른 등의 거대한 독점적 기업결합을 형성하게 되고, 이 독점을 매개하는 은행 자본은 산업 자본과 긴밀히 융합하여 금융 자본이 성립되었다. 이리하여 본래 경제적 자유주의에 입각한 산업 자본을 중핵으로 하던 자본주의는, 거대한 독점 자본가의 금융 과두 지배로 변모하여 독점 자본주의가 성립되었다. 독점 자본은 세계 시장을 분할하고, 또 과잉 축적에서 발생한 자본의 해외 투자가 상품수출과는 별도로 중요한 의의를 갖게 되자, 제국주의의 경제적 기초를 형성하더니, 한 걸음 더 나아가 최대 이윤을 추구하여 제1차 세계 대전 후에 일어난 자본주의의 전반적 위기에 처해서는 국가 독점 자본주의로 이행하고, 드디어는 국가 기관을 지배하며, 파시즘 발생의 모체가 되었다.
독재는 무제한으로 광범위한 권한을 가진 독재자가 지배하는 정치 형태. 단, 그것은 어디까지나 과도적 비상적인 예의 상태라는 점에서 전제와 구별된다. 이런 의미에서는 시대 전환기, 국가의 비상 사태에 출현했던 동양 및 그리이스, 로마의 독재, 이를테면 케사르와 같은예도 이에 포함된다. 그러나 근대 부르조아 사회의 성립기 또는 그 붕괴기에 출현하는 것을 가리킬 때가 많다. 크롬웰, 나폴레옹 등은 근대 사회의 탄생 및 반동 세력을 억제하기 위하여 나타났으며, 보나파르티즘도 광의로는 여기에 속한다. 뭇솔리니, 히틀러, 프랑코 등은 자본주의 말기의 위기에 대응하는 파시즘 독재로서 나타나 전체주의의 형태를 취했다. 이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를 타파하여 계급 없는 사회의 실현을 부르짖는 과정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가 정치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프롤레타리아 독재라 하며, 그들은 계급 독재를 행한다. 그 형태로는 소비에트, 인민 민주주의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이론이 사실에 선행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여하간에 독재는 반드시 개인의 독재일 뿐만 아니라 자코뱅, 나찌스, 공산당같이 집단 당등의 독재일 수도 있으나, 그것은 진행과정에서 숙청 획일화 현상이 뒤따른다. 독재는 전영역에 걸친 절대적 권위를 요구하며, 또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때때로 신화까지도 만들어 낸다. 또한 독재는 현행 헌법을 일시적으로 정지함으로써 성립되는 수임 독재와 현행 헌법을 부인하고 새로 만들어질 헌법을 근거로 하는 주권 독재로 구별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경우는 당연히 후자에 속한다.
돌궐은 6세기 중엽 이후 약2세기에 걸쳐서 몽고 고원. 알타이 산맥 지방을 중심으로 활약한 투르크 종족의 한부족. 또는 그들이 지배한 국가명. 투르크 종족은 BC 3세기 말엽부터 정령 고차 철륵 등의 명칭으로 중국 사료에 나타나 있는데, 알타이 산맥지방에 있던 철륵의 일족. 아사나씨의 수령 토문은 유연 철륵을 격파하고, 독립하여 일리 카간이라 칭하였다. 한편 토문의 동생 디자블로스는 서방으로 서투르키스탄의 에프탈을 격파하였다. 이리하여 돌궐의 세력은 동은 만주에서, 서는 중앙 아시아, 북은 에니세이 강 상류 유역까지 미쳤다. 그러나 이 판도는 6세기 후반에 가서 분열되어 몽고 고원은 동돌궐이, 중앙 아시아는 서돌궐이 각각 그들의 세력 지반으로 했다. 동돌궐은 수 말기와 당 초기 사이의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세력을 떨쳤으나, 당의 공격과 철록 제부족의 독립으로 와해되고 당의 기미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약 50년 뒤에 다시 독립 부흥했으나, 종족간의 싸움으로 인해 철륵의 한 부족 위구르에 의해 멸망되었다. 또 서돌궐은 멀리 비잔틴 제국과 동맹을 체결하고 사산 조 페르시아를 협격하려 하였으며, 6세기말에는 투하리스탄을 그 수준에 넣었으나, 당의 세력이 중앙 아시아에 미치자 붕괴되었다. 이 국가는 일이라 칭하고 수장은 가한이라 하며, 그 밑에 소 가한 야브구 샤드 등의 제후가 있어 각지를 영유하고 영내 제부족의 통치에 임하였다. 또 테긴이라 불리는 관료가 가한 제후 등의 지배 통치를 보필하니, 이들은 베크라 총칭되어 지배 계급을 구성하였다. 한편 부둔이라 호칭되는 피지배 계급은 주로 유목 생산을 영위하고, 수공업 등의 제품을 공납품으로 베크에게 납부하였다. 이른바 돌궐 비문은 부흥 당시의 동돌궐 및 예니세이강 상류에 거주하던 키르기즈족이 남긴 것으로 북아시아 제족이 스스로의 언어 문자를 사용하여 쓴 최고의 문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