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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는 작은 촌락과 조그만 마을

**♥♥** 2019. 6. 6. 11:26

 도시는 개념:도시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시대에 따라 또 지역에 따라서 각기 특수한 형태 성격을 갖고 있어서 일관된 개념을 찾아내기는 곤란하다.  현재는 인구의 다소에 의하여 도시와 촌락을 구별하는 경우가 많으나, 역사적으로도, 촌락에 비하여 도시는 비교적 다수의 인구가 밀집하고, 어떤 특정한 기능을 갖고 있는 지역이라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도시를 성립시키는 요인으로서는, 정치상의 중심지, 군사상의 거절 또는 군대의 주둔지, 상공업의 중심지, 교통상의 요지, 종교적 성지 등이 있는데, 이들 요소를 대게 복합적으로 갖춤으로써 도시형성의 요인을 이루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도시를 형성하는 이상의 성질들이 어느 것이나 농촌적이 아닌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도시라는 존재는 항상 농촌과 대조적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원칙적으로 도시는 비농민의 집주지라고 보는 것이 보통이다. 서양:서양사상에 있어서의 도시의 출현은 이미 오리엔트 시대에 시작된다. 메소파타미아 양강 지방의 우르, 라가시, 니푸르, 니네베, 바빌론과 이집트의 나일 강의 멤피스, 테베 등이 있는데, 그들중 어떤 것은 그 출현이 소급될 것으로 보인다. 이들 여러 고대 도시들은 오랜 기록에 의하면 매우 대규모적인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러한 소전에는 과장이 섞여 있음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이들 도시의, 도시로서의 성격도 비농민의 집주뿐만이 아니고, 많은 농지를 포함한 부족적인 취락이었다고 보여진다. 그리이스 세계의 폴리스의 성립에는 군사적 계기가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폴리스의 성립 과정인 집주, 즉 혈연 단체인 촌락 공동체의 몇 개가 합동 내지 병합하는 것은 공동 방어의 필요에서 나온 것이며, 또한 시역의 선택 특히 식민지 건설의 경우에는 해변의 작은 구릉을 중심으로 한 토지가 선택되었던 것도 방어를 배려한 까닭에서이다. 폴리스의 규모는 작은 것이었지만, 헬레니즘 시대가 되면 알렉산드리아 같은 것은 이집트의 수도일 뿐만 아니나 광역 세계의  교환 경제의 중심지로 인구가 30만에 이르는 대도시가 되었다. 로마가 도시 국가를 출발점으로 한 것은 그리이스와 마찬가지였다. 그 후 속주의 정복에 의해 세계 국가가 된 후에도, 로마는 오랜 도시 국가 시대의 이념인 시민권에 의한 국가 통일을 기도했었으나, 로마의 대국가적 기구는 전영역의 부를 수도 로마 시에 집중시키게 되고, 도시적 발전을 촉진시키게 되어 고대 세계 최대인 80만의 대인구를 가진 도시를 출현시켰다. 기타 로마 제국의 속주 특히 라인, 다뉴브 강 유역에는 군대 주둔의 도시가 생겼으나, 그들 중 대부분은 로마 쇠망 후 중세 도시로 전화되었다. 고대 도시가 군사적 성질을 강하게 지닌 데 대하여, 중세 도시는 시장의 소재지이며, 상인 및 장인을 주요한 구성 요소로 하는 경제 단체였음을 특색으로하였다. 따라서 전형적인 중세 도시의 출현은 상업이 부활한 12세기까지 기다리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12세기부터 14세기까지에 도시수도 인구수와 더불어 증가하였다. 그러므로 그 이전에 존재한 궁정 도시나 주교 도시는 그 소비적 성질로 해서 중세 도시의 전사로 보여지며, 그것이 생산적 의의를 갖게되고, 상인 및 장인이 주체적 주민이 되기에 이르러, 비로소 중세 도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중세 도시가 영주의 권력으로부터 완전히 탈각하고, 명의상으로 황제에 직속된 것이 자유 도시 혹은 제국 도시로서, 시민의 구성이 비교적 단순하고 시민 정신이 충실했던 것이 독일 도시의 특색이었다. 이에 비해, 이탈리아 도시는 그 구성이 복잡하여 지주적 기사적 요소를 지녀, 그리이스의 폴리스에 유사한 도시 국가였다. 근대에 들어오면, 도시는 국가의 경제 정책을 떠나 도시 자체의 독자적인 발전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국가의 경제적 성쇠에 그 운명이 좌우되었다. 에스파니아의 마드리드, 포르투갈의 리스본,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 등의 번영과 그 후의 침체가 그 좋은 예이다. 또한 근대 도시의 현저한 현상은 수도 도시의 발전이며, 특히 런던, 파리는 영국, 프랑스의 식민적 세계 정책의 진척을 배경으로 하여 놀라운 발전을 이룩하였다. 18세기 이래의 근대적 상공 도시의 족출은 산업 혁명의 결과였으며 이러한 신흥 도시들은 농촌 인구를 흡수하여 도시와 농촌의 인구비를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19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미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거대 도시의 출현은,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경이적 산물로,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경이적 산물로, 그것은 너무나 거대하기 때문에 시민 상호의 사회적 관련을 희박하게 하고, 따라서 공동의 시민 의식이 결여된 혼합 사회가 형성되었다. 동양-중국의 도시는 유럽의 도시처럼 고대 도시 중세 도시 근대 도시로 확연히 구별하기는 곤란하다. 고대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도시의 발전은 수도로서 발달한 정치적 도시이다. 선진 시대의 주요 도시는, 수도 및 제후의 국도로서, 주위를 성벽으로 두른 방형의 도시였다. 진 한 시대에는 워양 장안 등의 수도뿐만 아니라, 군현등 지방 관아의 소재지도 도시로서 발달했다. 이후 남북조 수 당에 이르는 동안 이와 같은 정치 도시는 점차 발달하여 당의 장안은 인구 100만을 넘는, 당시 세계 최대의 도시였다. 이들 도시의 공통된 성격은 그 비생산적 소비적인 면이다. 다만 이 시대에도 남해 무역의 중심지 꽝조우나 대운하의 요충 양조우처럼 경제적 요인에서 발달한 도시도 약간은 있었다. 송대이후는 위와 같은 정치적 도시 외에 경제적 요인에서 발달한 도시도 약간은 있었다. 송대이후는 이와 같은 정치적 도시 외에 경제적 의미를 갖는 도시, 특히 지방적 소도시나 초시가 중국 중부를 중심으로 많이 발달되었다. 또 고대에 있어서는, 시제에 의하여 상업 지역이 한정되고 경제적 활동을 제약받았던 정치 도시도, 경제 도시로서의 기능을 강화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경제 도시의 발달은 농엽 생산력의 향상과 교환 경제의 진정에 기인하고 있다. 명대의 중엽부터 수공업의 발달이 현저하여 이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도 발달했다. 또 북중국이나 남중국에서는 경기시의 발달로부터 소상업 도시가 나타났다. 이들 도시에서는 상업 길드나 수공업 길드가 결성되어 후에 회원 공소가 설립된다. 그러나 유럽의 중세 도시가 길드를 중심으로 하여, 봉건 영주로부터 자치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은 중국의 도시의 경우에선 찾아볼 수 없다. 19세기말부터 상하이 텐진 한코우 난징 등은 자본주의의 발달에 따라 외국 무역이나 상업 금융의 중심지로서 새롭게 근대적 도시로 발전하였다. 중앙 아시아에서 서아시아에 걸치는 사막 지대의 도시 형태는, 오아시스 도시로서 형성되었는데, 사막 지대 독특한 유목 국가의 경제적 기초인 오아시스 농업과, 궁정 수공업, 그리고 중계 상업에 알맞도록 수리를 위한 관개 공사나, 주변 유목민의 약탈에 대비한 방위 설비, 대상에 편의를 주는 시장 및 숙역 시설에 대한 깊은 고려에서 설계되었다. 이들 도시는 근대에 들어와서는, 동서 교통로로서의 역할을 인도 항로에 빼앗김으로써 여전히 엣 모습을 지닌 채 근대화가 이루어져지 못하고 있다. 다만 서아시아ㅢ 일각에 위치하고 있어, 특히 유럽 문화와 교류의 기회가 잦았던 터어키의 여러 도시들이 근대화 도시 내지 현대식 도시로서 발전하고 있으며, 석유의 산출로 인하여 이란의 유전 지대에 있는 도시들이 이전의 오아시스적 도시에서 석유 냄새가 풍기는 공장 도시로 변모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뜨인다. 일본에 있어서의 도시 변천을 보면, 세계사적인 도시 변천과 같이 고대 도시. 중세도시, 근대도시로 나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