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넵투누스, 노,노동당, 노동 총동맹,노르만인의 뒷이야기

**♥♥** 2019. 6. 3. 10:32

넵투누스는 로마의 바다와 그 밖의 물의 신. 주피터의 형제이며, 여신 암피트리테의 남편이다. 

노는 주대의 희성 후작의 나라. 도읍은 취푸. 시조는 주의 무왕의 아우이며, 건국의 대공신이기도 한 주공 단이다. 그러나 주공은 주의 서울에 머물러 무왕 성왕을 보필하고, 장남 백금이 봉지에 가서 노후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봉지는 원래 동이 종족의 근거지였으므로 그 통치가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그 국세는 차츰 쇠약해져서 춘추 시대에는 제 진 초의 어느 나라엔가 종속하여 그 명맥을 이어가는 제2류의 나라에 불과했다. 특히 춘추의 말기에는 실정을 거듭하여 환공의 자손인 맹손씨 숙손씨 계손씨의 3씨가 세력을 떨쳤고, 영토도 거의 이 3씨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특히 계손씨의 가제인 양 호가 사실상의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공자는 이 삼환의 세력을 눌러 군후의 세력을 회복하고자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국세는 더욱 쇠퇴하여 제34대 경공 때에 초의 고열왕에게 멸망당했다. 노의 국세는 시종 일어나지 못했으나, 주 왕조가 쇠퇴한 춘추 시대에 주의 전통적인 제도 문화를 가장 훌륭학 전한 나라로서의  긍지를 가졌고, 공자도 이곳에서 태어났으며, 노의 사기에 근거하여 춘추를 편찬했다고 하듯이 노나라는 문화사상 특이한 존재로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노동당은 British Labor Party 영국의 정당. 설립된 노동 대표 위원회의 후신으로서, 총선거에서 당선시키고, 노동당이라는 명칭을 채용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까지 당은 노동 조합 독립 노동당 페이비언 협회 등의 사회주의 단체와 협동 조합의 연합 조직을 취하였으며, 의회에서는 노동 조합의 압력 단체라고 하는 정도의 힘밖에는 갖지 못했다. 조직을 확대 강화하여 뚜렷한 사회주의 강령을 내세우고, 지방에 지부를 설립, 근육 두뇌 노동자의 개인 입당을 인정했다. 이를 기초로 당세를 확대하여 당수 맥도날드는 2회에 걸쳐 단복 내각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여당은 제2당. 소수 제1당으로 자유당의 각의 협력을 전제로 한 약체 내각이었으며, 특히 뒤의 내각은 세계 공황의 통격을 받아 맥도날드는 사직한 후에 노동당을 떠나 연립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 배신으로 노동당은 타격을 받아 제군비 문제에서도 동요되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애틀리 등의 당수뇌부는 처어칠의 전시 내각에 들어가 활동하였고, 대독전 종결 후에는 총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승리, 애틀리 내각을 조직하였다. 이 제3차 노동당 내각은 6년간 계속 집권하여, 그동안 복지 국가를 목표로, 잉글랜드 은행, 탄광, 민간 항공 기타의 중요 산업의 극유화와 사회 보장의 확대 정비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총선거에서 패배하여 보수당에 정권을 이양하였고, 애틀리 당수가 은퇴, 게이츠켈이 그 후계자가 되었다. 그러나 게이츠켈은 죽구, 윌슨이 당수가 되어 총선거에서 신승하여 윌슨 내각을 구성하였고, 다시 보수당에 대승하여 정권당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선거에서는 국제 수지의 개선, 지방 선거의 승리 등 유리한 입장에 있었으나, 파운드화 방위를 위한 긴축 재정 정책으로 국민의 불만을 사게 되어 보수당에게 패배하였다.

노동 총동맹은 미국:미국의 직업벌 노동 조합. 직능 노동 연맹 이름으로 설립되어 AFL로 개칭된 것으로, 숙련 노동자만으로 조직되었다. 곰피어즈를 지도자로 하여 파업에서 지도권을 장악, 노동 기사단에 대신해서 이후 미국 노동 운동의 중심이 되었다. 지도 이념은 CIO보다 보수적이며, 자본주의 제도를 시인, 그 속에서 노동자의지위 향상을 목적으로 하였다. 또 경제 투쟁에 주력하며, 정치 활동을 배척, 불편 부당, 온화 협조적이었으나, 루우스벨트 이래 민주당에 동조하였다. 조직 문제를 둘러싸고 CIO가 분열하였으나, 계속 미국에서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유 노련의 기수로서 노동 운동의 중핵을 이루었다. 반공 전선 강화를 계기로 CIO와 합동하였다. 프랑스:결성된 프랑스의 노동조합 연합체. 생디칼리슴을 지도 방침으로 하고, 아미앵 헌장에서 경제주의. 정당 운동의 배척, 계급 투쟁주의. 총파업에 의한 자본주의의 타도 등을 원칙으로 결정하였다. 이후 파업 시위 운동을 지도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약점이 드러났으며, 간부는 전쟁을 지지하였기 때문에, 전후 간부파와 혁명적 소수파와의 대립이 표면화되고, 총파업 실패 후는 이것이 더욱 결정적으로 되었으며, 프로핀테를 가입이 문제되자, 소수파는 제명되어 CGTU를 만들었다. 인민 전선 운동의 발전으로 다시 합쳤으며, 조합원 5백만을 넘는 세력으로 커졌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공산계 조합은 제명되었으나, 레지스탕스 운동 중에 통합을 실현, 해방 후 세계 노동 조합 연맹 결성에 큰 역할을 하였다.

노르만인은 스칸디나비아 반도, 덴마아크를 원주지로 하는 게르만인의 일파. 노르만인이란 북방인의 뜻으로, 이 밖에 바이킹, 데인인, 파라그인 등의 별칭이 있다. 게르만의 대이동 때에 원주지에 머물러. 어업 농경 목축 또는 해상 약탈에 종사했는데, 8세기경 본국에 있어서의 통일적 왕권의 형성에 따라, 종래의 독립적 지위를 잃은 소수장들은 인구 증가 때문에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주민을 이끌고 약탈적 이동을 개시하였다. 그 범위는 전유럽에 미치고, 제2차 민족 이동이라고 부를 만한 양상을 보였다. 이동 경로는 대체로 삼붐된다. 덴마아크계에 해안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 동 서프랑크 잉글랜드를 덮쳐 그수장 롤로는 샤를 3세로부터 노르망디 지역을 봉토로 받았고, 후에 노르망디 공 기욤은 노르만 정복으로 영국에 노르만 왕가를 열었다. 노르웨이계는 셰틀랜드 제도 오오크니 제도를 거쳐 아이슬란드 그리인란드에 이르러 일부는 북아메리카에 도달하였다. 스웨덴계는 러시아에 상륙. 수장 류리크 밑에서 노브고로드 공국을 건설했다. 또 프랑크를 엄습한 그들의 일부는 지중해로 진출 양시칠리아 왕국을 세웠다. 이들 노르만의 이동은 처음에는 약탈적이었으나, 정착과 더불어 점차 평화적 상업에 종사하게 되어, 상업의 부활에 큰 자극을 주었다. 또한 정주지에서 원주민과 융합 동화하여 유럽 중세 세계의 형성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