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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네덜란드 독립전쟁, 네루,네케르,네코2세 역사 이야기

**♥♥** 2019. 5. 31. 10:19

네덜란드는 라인, 마이스, 스헬데 등의 강의 하류를 점하는 저지 지방. 최초의 기록에 나타난 것은 케사르의 원정 때이며, 라인의 북쪽에 원시 게르만의 제 부족, 남쪽에 켈트인의 제 부족이 살고 있었으나, 케사르이후 종종 원정이 행해져,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속주 갈리아 벨기카가 설치되고, 게르만인에 대한 방볍 역할도 다하였다. 그러나 게르만인의 이동으로 프랑크가 지배하게 되었고, 프랑크 제국의 분열시 그 귀속이 문제화되었으나, 8세기말 스헬데 강 이서가프랑스 국왕에게, 이동이 독일 국왕에게 소속하게 되었다. 9세기 중엽에 프랑스령에 플랑드르 백령이 성립되고, 독일령에도 12세기경에는 브라반트 공국, 홀란트 백령 등 다수의 군소 봉건 국가가 성립되어, 상업의부활과 함께 국제 상업의중심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직물 공업의 새로운 발전이 이룩되어, 브뤼지를 선두로 하는 상공업의 중심지로서의 중세 도시가 은진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분열 상태도 14세기 말 브르고뉴 공국에 의해 극복되고, 정치적으로 통일되어, 부르고뉴 공녀 마리와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과의 결혼에 의해,이 땅은 합스부르크가 소유령이 되고, 에스파니아 절대주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북부 7주가 독립을 선언하여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 탄생되고, 남부는 그 후도 에스파니아, 오스트리아, 프랑스, 네덜란드 등 제 외국의 지배를 계속 받았으나, 벨기에 왕국으로서 독립, 이어서  룩셈부르크대공국이 독립함으로써 베네룩스 3국이 성립되었다.

네덜란드 독립 전쟁은 16세기 후반 네덜란드가 에스파니아와싸워 그 북부7주가 독립을 쟁취한 전쟁. 16세기 초엽부터 네덜란드는 프로테스탄티즘이 침투하여 시민간에는 캘빈주의가 만연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에스파니아 왕 펠리페 2세는 중세적 세계 통치를 꿈꾸고,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박멸하려고 기도하여 네덜란드에 대해서 종교적 정치적 탄압 정책을 강행하였으므로, 이에 대한 반항 운동이 우선 오란예 공 빌립 1세, 에그몬트 백등이 지도하는 대귀족 중에서 일어났다. 고이센 동맹을 결성하고, 급진파 대중의 우상 파괴 운동을 지도하였다. 부임한 신임 총독 알바 공은 피의 위원회를 열어 에그몬트 백 등 다수의 반도를 처형하였으며 무서운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으므로, 반항 운동도 이에 따라 격화되고, 망명 중에 있던 빌립 1세의 지휘로 본격적인 독립전쟁으로 들어갔다. 제 고이센에 의한 블리싱겐이 점령된 후 오란에 공 빌립 1세가 귀국하여 폴란드, 제엘란트 등 북부 주들을 통솔하고, 남부를 제압하여 북상하고 있던 에스파니아 군에 대해서 과감한 항전을 계속 네덜란드 전주의 동맹 조약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카톨릭적인 남부와 캘빈 파인 북부와의 종교적 대립과 경제적 이해의 불일치로, 이 동맹은 난항을 거듭하게 되었으며, 총독인 파르네세의 교묘한 분열 정책으로 남부는 이탈하고, 북부7개 주만이 유트레히트 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을 선언, 빌립1세의 지도로 네덜란드 연방 공화국의 기초를 세웠다. 에스파니아와의 전쟁은 그 후도 계속되다가,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 국제적 승인을 얻었다.

네루는 인도의 정치가. 민족 운동의 지도자. 알라하벳의 귀족 출신으로 16세부터 7년간 영국에 유학,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간디의감화를 받아, 국민 회의파가 지도하는 독립 운동에 참가하여, 곧 웃타르 프라데시 지방의중심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불복종 운동 외국계 직물의 보이코트 운동에 참가한 끝에 투옥되었다. 유럽 여행 길에 올라 각지를 순방한 후 귀국하자마자, 인도 국민 회의파의 중심 지도자가 되고, 회의파의 의장으로 선출되어 사회주의 경향이 농후한 소위 네루 시대를 만들었다. 염세 항의 때문에 투옥되었으며, 그 이후는 석방과 투옥이 되풀이되어, 3년 6개월의 감옥 생활을 거쳐 석방되었다. 인도국민 회의파 의장이 되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인 간디의 제3회 반 영국 불복종 운동에 참가, 지도하던 중 체포되었다. 인도 임시 정부 부수상 독립 후는 수상겸 외상이 되었다. 수상에 취임한 후부터는 그는 이전에 보였던 사회주의적 경향을 포기하였으나, 이는 국민 회의파의 분열을 피하기 위해 회의파내의 우파와 타협한 것이라고 인정된다. 그러나 외교면에서는 동서 양진영의 어느 쪽에도 편들지 않는 자립 평화외교를 강력히 추진하여, 제3세력 블록을 형성하였으나, 중 인 국경 분쟁이래 점차 반공색을 강화하다가 사망하였다. 마하트마 간디 인도의 발견 자서전 세계사 이야기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네케르는 프랑스의 재정가. 정치가, 제네바에서 신교도의 가정에서 태어나, 파리의 은행계로 진출, 점차 축제하고, 텔뤼송 네케르 은행을 설립하였다. 튀르고 등을 비판한 논문이주목을 끌어, 재정 총감이 되었다. 세제 개혁 관직 정리 용비 절감에 착수하면서도, 아메리카 독립 혁명에의 개입 때문에 재정 정책은 파탄에 직면하였다. 자기 번호를 위해 재정 보고를 발표할 때, 재정 지출, 특히 궁정비의 난맥을 폭로하였기 때문에, 그 해 5월 면직되었다. 명사회 소집을 앞두고 칼론과 논전하였고, 로메니 드 브리엔의 뒤를 이어 다시 재정 총감 자리로 되돌아갔다. 삼부회의 구성에 대하여는 제3신분의 배수화를 결정하는 등 부르조아지의 희망의 중심이 되었으나, 삼부회 소집이후 큰 성과 없이 면직되었다. 그의 면직은 바스티유 습격의 직접 원인이 되었으며, 며칠 후에는 국민의 환호를 받으며 복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왕당파나 입헌 왕정파의 어느 쪽에도 가담치 않고, 별로 할일도 없이 사직하고 스위스로 은퇴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네케르 재정론. 프랑스 혁명론 등 자기 변호를 위한 저술이 있다.

네코2세는 고대 이집트 제2왕조의 왕. 프삼메티코스 1세의 아들. 앗시리아의 몰락 후 시리아에 출병, 유다 왕국의 요시야를 메킷도에서 격파한 후, 카르케미시의 싸움에서 네부키드넷자르 2세에게 패하고, 시리아로부터 후퇴하였다. 내치에 뛰어나 나일 강과 홍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파고, 페니카아인을 고용하여 아프리카의 연해를 탐험케 하였으며, 이 탐험대는 아프리카 대륙을 일주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