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남조, 남종화,낭트칙령,내셔널리즘들의 이야기

**♥♥** 2019. 5. 31. 09:25

남조는 당나라 때, 티벳 버어마족이지금의 원난 지방에 세운 왕국. 조란 왕의 뜻. 당시 쓰촨 성의 서부에서 원난 성에 걸치는 지역에는, 몽수 월석 시랑 등섬 낭궁 몽사 등의 6조국이 세력을 다투고 있었는데, 그 중, 몽사 조국이 가장 남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남조라고 한다. 당의 정관 연관에는 남조가 대몽국이라 칭하고,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그 후 대몽은 당과 결속하여 세력을 확장하더니, 8세기 중엽 피라각 때 다른 5조국을 병합하여 6조의 통일에 성공한 후, 딸리에 도읍하였고, 이 지방에 세력을 신장해 오던 티벳 세력을 격퇴시켰다. 그러나 당나라와 불화가 생겨서 한때는 당나라의 토벌을 받았으나, 안사의 난이후 당의 윈난 경략이 주춤한 틈을 타서 남조는 도리어 쓰촨까지도 세력을 뻗쳤다. 특히 8세기 말기에 이 모심이 남조를 다스릴 때는, 티벳과 결속해서 당에 침공하기도 하여 남조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이 모심은 티벳의 고압적인태도에 불만을 품고 당에 귀순하였다. 이 모심의 사후 재차 당과 남조 사이는 불화하게 되고, 이후 여러 해 동안 양자 사이는 불화가 계속되어, 당말의 혼란기에는 당과의 교통은 완전히 두절되었다. 이리하여 정 매사의 찬탈로 멸망하였다. 남조에서는 부친 이름의 끝 자를 아들 이름의 첫 자에 붙이는 독특한 부자 연명의 형식이 있었다.

남종화는 명의 동 기창이 처음으로 부른 화파의 호칭. 남화라고도 부른다. 심 석전 문징명이 중심이 되어 명 청 시대에 유행한 하나의 화룡은 중국의 남방적 풍토나 문화를 기반으로 개화한 것으로, 그 근저에는 깊은 역사의흐름과 인간성이 있다. 그들은 소인 화가임을 표방하고 자유를 중시하며, 특히 시정이 넘치는 산수화를 즐겨 그렸다. 구도는 자연의전경을 대관하고, 산이나 바위의 굴곡에 대하여 부드러운 선을 여러겹으로 걸쳐 때로는 아련한 원근이나 음영을 그리기 위해 가랑비와같은 반점을 사용하고, 흑색을 기조로 하여 그 위에 담채를 가하였다. 이러한 경향의 표현법은 멀리 오대의 동 원 거연을 비롯하여, 송의 미불 미 우인 부자나 원의 사대가에서 볼 수 있는것으로, 그들은 오히려 이 전통의 계승자라 할 수 있다. 명말의 동 기창은 이파의 유력자로 대성한 사람인데, 자파의 문류를 권위 있게 설명하기 위하여 당시에 융성하였던 선의 남종에 비겨서 그림의 남종이라 말하고, 그 원조를 왕 유로 삼았다. 이 설과 호칭은 그의 벗 막 시룡과 심 영 및 청의 방훈에게도 인용되어 일반에게 퍼졌다. 이 밖에 동 기창의 신어에 문인화가 있다. 문인이란 높은 교양과 시문의 재능을 가진 사람을 뜻하는데, 중국에서는 이런 사람들이 고대로부터 비직업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는 이러한 그림을 문인화라고 불렀는데, 남종화와 혼동되어 거의 구별이 있다.

낭트 칙령은 프랑스 국왕 양리 4세가 국내의 프로테스탄트에게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 칙령. 국내의 종교적 분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본래 프로테스탄트였던 앙리 4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함과 동시에, 이 칙령으로써 신앙의 자유를 인정했다. 주요한 내용은, 1)프로테스탄트에게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인정한다. 2)200의 도시와 300의 성채에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공공언한 신앙을 인정하며, 3)프로테스탄트의 학교에 국가의 재정적 원조를 주며, 4)프로테스탄티즘의 서적의 출판을 하가하고, 5)프로테스탄트에게 완전한 시민권을 주며, 6)프로테스탄트에게 집회의자유를 주며, 스스로 재판할 수 있게 하고, 7)8년간 약 200의 성채에서의 완전한 자치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 칙령으로 일단 종교 전쟁인 위그노 전쟁은 정치적으로 해결되었으나, 종교적 대립은 그 후에도 계속되어, 특히 루이 13세와 루이 14세 시대에 프로테스탄트는 끊임없이 탄압당했다. 루이 14세는 저대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종교적 통일을 목적으로 이 칙령을 폐지함으로써 신교도 약 40만이 프로이센, 영국, 홀란트 등으로 망명하였다. 신교도들이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칙령의 폐지로 경제계의 타격은 매우 컸다.

 내셔널리즘은 국가주의 국민주의 민족주의 국수주의 등의 여러의미가 있으며, 대체로 국가 민족의 통일 발전을 강조하는 주의 또는 운동, 내셔널리즘은 유럽에 있어서는 중세의 통일이 무너진 후, 특히 19세기에 들어와 발전되었으며, 20세기 초 이후에는 아시아, 아메리카에서도 발전을 보았다. 신문 사회의 붕괴와 크리스트교적 질서의 해이로 내셔널리즘은 공통의 언어 문화 역사 등 쉽게 파악되는 가치 때문에, 민족의 전생활 영역에서 결정적인 의의를 획득했다. 절대주의 체제의 통일 국가가 출현하자, 국민이란 개념이 나타났고, 나아가서 시민이 세력을 갖고 자본주의 자유주의가 발달하자, 절대주의의 부정으로 지향, 전제 군주정에 대한 국민주의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반 봉건 반신분제적 내셔널리즘은 전형적으로는 프랑스 혁명, 아메리카 독립 혁명 등에서 보이며, 부르조아적 내용의 시민 혁명을 지도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내셔널리즘이라 불리어지는 것은, 여기에 부연하여, 후진국 피지배 민족 소수 민족간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우선 비인 체제에 반항하며, 자유주의와 결합하여 다른 민족의 지배에서 이탈하든가, 또는 소국으로 분열해 있는 같은 민족이 국민적 통일을 수행하려는 운동이 된다. 그리이스의 독립. 7월 혁명후의 벨기에의 독립, 폴란드의 반란, 2월 혁명 후의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 운동 등은 전자에 속하며, 이탈리아, 독일처럼 19세기 후반에 국가 통일을 달성한 것은 후자에 속한다. 역사상 이 시기를 내셔널리즘 시대라고 한다. 19세기말부터 제국주의 성립과 더불어 내셔널리즘의 내용도 변질되어, 같은 종족에 속하고, 공통의 언어 역사 문화 계통을 갖는 민족을 한 덩어리로 한다는 소위 법 슬라브주, 범 게르만주의 등의 형태가 나타났으며, 한편 발칸을 중심으로 소수 민족은 민족 해방을 주장하며, 베르사이유 조약에서는 민족자결주의가 채택되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에 나타난 반 자유주의적 파시즘도 이 시대의 내셔널리즘의 특징적인 표현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사회주의적 이데올로기나 민족 자본의 육성에 지지되어 아시아, 아프리카 등 후진 지역에 반식민지적 내셔널리즘이 발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