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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내셔널, 그레이, 그리이스 독립 전쟁,그리이스 왕국,그림형제,글라디아토르이이야기

영국 노동조합의 전국적 연합체. 런던에서 개최된 노동 조합 전국 대회에서. 오우엔에 의해 생산자 계급 전국 도덕 대연합의 설립이 제안되어 전국적인 연합체가 조직되었다. 이듬해 제2회 대회에서 규약이 작성되고, 거기서 전국 노동 조합 대연합이라는 명칭이 채택되었다. 이로부터 열광적인 조합 운동이 전개되고, 무수한 조합이 이에 참가하였으며, 50만의 노동자가 등록되었다. 그러나 연합체 내부의 분열식을 실력 행사에 두느냐, 교육 선전에 두느냐에 대한 의견 대립과 고용주측의 공장 폐쇄에 의한 역습, 농업 노동자 가입 문제를 둘러싼 정부와의 대립으로 정세는 악화되고 괴멸 상태에 빠졌다. 이리하여 그 생명은 불과 1년간 지속되었을 뿐이었다. 그, 후로 오우엔과 노동 조합과의 직접적 관계는 없어졌다.



그레이는 영국의 정치가. 외교관 캠벨베너만 및 에스퀴드의 자유당 내각의 외상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전 및 대전 중의 영국 외교를 맡았다. 의상 취임 전해에 영 프협상이 성립되어 독일의 세계 정책이 대처하여 프랑스와 제휴하기에 이르렀으나 이기본선을 이어받은 모로코 문제에 관한 알헤시라스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더 한층 밀접하게 되었다. 영 러 협상의 성립에 의해 삼국협상이 완성되고, 나아가 군사 협정에 의한 그 보장이 촉진되어, 대전발발 전의 영국의 외교적 체제가 이룩되었다. 한편 국제 제국의 위기 완화를 위해서도 노력하여 발칸 전쟁 후 분쟁의 조정에 나섰으며, 사라예보 사건 직후에는 오스트리아, 세르비아간의 조정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리이스 독립 전쟁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하에서 그리이스를 독립시킨 전쟁.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이래 그리이스는 장기간 투르크인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그리이스인 민족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다른 이질의 민족에게 지배를 받는다는 데 대한 반감이 있는데다가 투르크의 여러 가지 압력도 가하여져 독립에의 의지를 강하게 됐다. 특히 19세기에 들어서 민족주의적 풍조가 높아지자, 오메사에서 그리이스 상인을 중심으로 한 비밀 결사 헤타이리아가 조직되었다. 그 후 비인 회의에서 독립이 승인되지 않자, 여기에 자극을 받아 독립 운동을 한층 더 활발하여지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는 낭만주의가 일어나 그리이스 애호주의도 활기를 띠어, 일반 지식인은 독립운동에 동조, 비인 체제하의 각국의  냉담한 태도를 제쳐놓고, 의용군 군자금의 모집  등이 진행되었다. 영국의 낭만주의시인 바이런은 그 대표적 인물이었다. 투르크내의 반란에 편승하여 독립군이 봉기하자, 신성 동맹은 독립 반대를 결의하였고, 투르크 군은 이집트로부터의 원조를 얻어, 아테네를 함락시켜 독립 운동을 실패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러시아의 니콜라이 1세가 즉위하여 남하 정책상 그리이스 원조에 주력하였고, 이에 자극을 받아 인도 확보에 노력하던 영국과 그리고 프랑스가 협동하여 원조를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3국의 제안을 거절한 투르크 이집트의 연합 함대를 나바리노 해전에서 격파하고 독립을 달성시켜, 런던회의에서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이에 의해 신성 동맹과  투르크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그리이스 왕국은 그리이스 독립 전쟁에 의해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다. 독립시이ㅡ 사정으로 인해 영국, 러시아, 프랑스의 세력이 들어와, 초대 오토 1세의 치세도 이세력의 균형에 골치를 앎았으며, 한편에서는 근대화의 진정, 종교적 대립, 민족주의 등의 여러 문제를 지녀, 발칸 문제의 축도가 되었다. 게오르기오스 1세의 통치 시대인 크레타 섬에서 그리이스에의 병합을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나, 투르크는 이섬에 있어서의 그리이스인과 투르크인의 동권을 인정하였다. 러 터 전쟁 때에 그리이스는 크림전쟁 때와 같이 궐기하려는 기운이 있었으나, 결국 자중하여 영국과 타협, 베를린 회의 후에 투르크와 교섭을 거듭하여 텟살리아 지방을 획득하였다. 두 차례의 반란으로 드디어 크레타 섬에는 자치에 가까운 개혁이 행해졌다. 쿠데타가 일어나 군인이 지도권을 장악하여 외교면에서는 발칸 동맹을 맺고, 2회의 발칸 전쟁으로 마케도니아를 얻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때에는 연합국측에 가담하여 전승국이 되었다. 왕정 폐지, 왕정이 부활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때에는 독일에 점령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좌우의 대립이 격화하였으나, 동유럽에 있어서의 유일한 군주국으로서 미국의 원조를 받고, 반공 진영의 최전선에 섰다. 그러나 파파도플로서 대령 등의 쿠데타로 군사 정권이 수립되고, 그 해 12월 국왕의 반쿠데타 기도가 실패하여 국왕은 망명, 파파도플로스 수상은군주제를 폐지하고 자선이 제1대 대통령이 취임하였다. 그해 11월 군부의 무혈 쿠데타로 기지키스 장군에 의한 새로운 군사 정권이 수립되었으나, 이 역시 정치적 경제적 불안에 허덕이다가 키프로스 사태르 ㄹ제기로 민정 이양을 선언하고, 프랑스에 망명중이던 카리만리스가 귀국하여 민간 정부를 구성하고 그해 11월 총선을 실시, 카라만리스 내각이 압승하여 국민의 지지를 재확인했다.

 그림형제는 독일의 언어학자, 민화 수집가. 형제가 함께 카셀 도서관원이 되었다가, 독일어학 및 독일 고대학을 연구하였다. 형은 의지적 성격을 가지고 고대 중세의 독일 문학을 개척하고, 비교 언어학의 방법으로 독문법을 체계화하였다. 동생은 시재에 뛰어나 두 사람의 성격은 상이하였으나, 평생 동안 생활을 함께 하였으며, 공동으로 작품 활동을 함으로써 많은 업적을 남겼다. 두 형제는 아이들과 가정을 위한 동화, 독일의 전설을 써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들은 주로 하이델베르크의 낭만주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중세를 찬미하고, 반 나폴레옹적 민족 의식을 가지고, 민족과 역사에 집착하여 민중 문학을 개척하였다. 또 고대 중세 문학의 연구는 독일어 사전의 기획을 낳게 되어 독일어학의 기초를 쌓였다.

 글라디아토르는 고대 로마에서 인섬 수람책의 하나로서 원형 극장에서 생사를 건 결투를 시켜 공중의 오락으로 삼은 노예. 로마의 빵과 구경 정책의 일익을 담당하여 특히 제정기의 사람들이 좋아했다. 공화정 말기의 글라디아토르의 반란은 이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켰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