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센 제국은 7~13세기 사이에 서아시아를 중심으로서는 애스파니아, 아프리카, 동은 인도에 이르는 이슬람 교도들의 대제국. 마호메트가 멕카에서 이슬람교를 창시하고, 메디나에서 이슬람 교단을 조직한 후 아랍 민족은 유사이래 처음으로 민족적 통일을 실현, 중세 유럽 제국을 경악케 한 대정복을 시작하였다. 그의 사후, 아부 바크르, 우마르, 오스만, 알리 등 여러 칼리프가 섰는데, 이 시대를 정통 칼리프 시대라 한다. 그들은 다분히 족장적 색채를 띠고 있었으며, 국가 조직도 간단하였다. 마호메트에게 최후까지 반항하다가 항복, 개정한 옴미아드가의 무아위야가 시리아의 다마스커스에 도읍을 하여 옴미아드 조를 창시하자, 그들은 동로마 제국의 제도를 본받아 국가 기구를 정비하고, 대정복 사업을 일으켜, 서는 에스파니아에서 동은 인더스 하곡에 이르는 아라비아 제국 최대의 판도를 영유하여 아랍 민족의 최성기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의 너무나 극단적인 아랍 민족 지상주의 때문에 비아랍인들의 불만이 높아지게 되어, 주로 이란인 개종자의 지지하에 혁명이 일어나 바그다드를 도읍으로 한 압바스 조가 성립함으로써 사라센 제국은 동서 칼리프 제국으로 분열되었다. 동칼리ㅍ 시대에는 이란적 색채가 강하고, 아랍 민족 지상주의를 초월하여 세계주의적인 이슬람 사회가 구성된 시대인데, 바그다드는 정치 경제 문화면에서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10세기경 이후, 지방 분권의 경향이 농후하여 제국내의 이란인 특히 투르크인이 세력을 갖기 시작하자 제국은분열되고, 몽고족의 침입으로 멸망하여 그들의 전통은 투르크인이이어나가게 되었다. 또 코르도바에 도읍했던 서칼리프 제국은 에스파니아의 크리스트교 제 왕국의흥륭으로 쇠퇴, 15세기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일소되었다.
사산 조 페르시아는 페르시아 왕조 아르다시르 1세가 건국, 야즈데게르드 3세 때 아라이바에 멸망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페르시아 제국. 즉 파르티아 등의 고대 페르시아로부터 이슬람화된 페르시아까지의과도기로서 이른바 페르시아 중세에 해당된다. 왕조의 명칭은 왕족의 시조이 조로아스터교의 제주였던 사산에서 유래한 듯하며, 그 손자 아르다시르가 페르시아 제국의 부흥을 꾀하여 파르티아 왕국을 무너뜨리고 크레시폰을 수도로 건국, 아케메네스 조의 속주제를 부활하였고, 다음의 샤푸르 1세와 더불어 강력한 집권적 국가 건설에 힘썼다. 이후 28대를 계속하였다. 안으로는 귀족의 실권이 강하여 왕위의 계승도 간섭하였으며, 국내은 불안정하여 왕이 없는 공위 시대도 있었다. 아르메니아의 소속 문제로 로마와 자주 다투었고, 왕조의 초기에는 많은 전승을 거두었다. 그 극성기는 후스라부 1세의치세로서 동로마 군을 격파하여 인근의 민족을 복속시켰으며, 후스라브 2세도 또한 판도 확대에 노력하였으나, 그 사후는 급속히 쇠하여 7세기초 사라센 제국의 침략을 자주 받다가, 야즈데게르드 3세 때 사라센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사산 왕조에서는 신권적인 왕 밑에 귀족 사제 관리 서민의네 계급이 있었으며, 귀족과 사제는 권력을 잡고 재판까지도 담당하였다. 또 조세 제도가 정비되어 있었고, 동서 교통에 따른 무역의 수입도 컸으며, 특히 각종 종예품이 중국이나 유럽에까지 팔렸다. 종교적으로는 극히 복잡하여 국교인 조로아스터 교 외에 유다교, 크리스트교, 마니교 등이 퍼졌고, 크리스트교 중에서는 네스토리우스 파가 성하였다. 한편 사산 예술의 특색은 건축 양식과 공예 도안에 있다. 유적으로서 유명한 것은, 아르다시르 1세의 궁전, 후스라브 2세의 카스르이시린 궁전과 보스탄 암굴의 조각 등이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아라비아반도의 대부분을 영유하는 왕국. 인구는 약8백만이며, 리야드의 멕카가 수도이다. 18세기 중엽에 중부 리야드와 멕카가 수도이다. 18세기 중엽에 중부 아라이바의 일게 족장인 사우디의 아들 모하메드가 이슬람의 복고파인 와하브의 시조와 결탁하여 왕국의 기초를 세웠다. 당시 아라비아 반도는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였으나, 모하메드이 아들 압둘 아지즈는 리야드를 점령하고, 더 나아가 멕타로 진출하였다. 와하브의 사후, 이븐 사우드가는 와하브 파의 교주를 겸임하고, 19세기초에는 그 세력이 시리아의 알렙포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그 후, 오스만 투르크의 이집트 총독 메호메트 알리에게 한때 정복당하는 등 많은 변천을 겪다가, 압둘 아지즈가 영국의 지지를 얻어 리야드를 탈환한 이래로 예맨과 오만을 제외한 전 아라비아 반도를 통일하고, 사우디 아라비아의 국호를 채택하였다. 이어 영국의 중재로 이라크, 예맨과의 사이에 아랍 동맹 조약을 맺어 서아시아 여러 나라와 우호 관계를 두텁게 했다. 그 후 성립된 아랍 연방에 예맨과 함께 가입하였고, 그 중의 네 나라와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러나 의회 헌법은 헤자즈에 있을 뿐이고, 네지드에는 옛 정치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다. 멕카, 메디나 등 소수의 도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유목 사회를 형성하고 있고, 정착 농경을 촉진하려는 움직임도 있으나, 관개 설비에는 많은 자본이 소모될 뿐 그 성과도 좋지 못한 것 같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석유 사업의 발전으로 미국 석유 회사는 그 석유 개발구너을 손에 넣고, 아라비아 아메리카 석유 회사를 설립하였다. 이른 사우드가 여러 가지 개혁을 이룬 재정적 기초는 그 석유 이권에서 들어오는 막대한 달러에 힘입은 바 크다. 이븐 사우드 왕의 사후, 사우드 왕이 즉위하였으나, 행정의 전권을 파이살에게 넘겼다. 사우드 왕이 다시 집정했으나, 예멘 혁명을 계기로 파이살이 다시 집권, 왕실회의는 사우드 왕의 퇴위를 결정, 파이살이 즉위하였다. 그 후 파이살 왕은 예맨 문제를 유리하게 해결함으로써 그의 지위도 굳어지던 중 그의 조카에서 암살당하고, 동생이며 황태자인 칼리드 빈 압둘 아지즈 공이 왕위를 계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