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국내전, 국민 공회, 국민 정부, 국민 회의파의 지나간 이야기

 국내전은 10월 혁명 후, 소비에트, 권력의 타도를 목적으로 행해진 열국의 간섭과, 러시아 국내의 부르조아 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반혁명 운동에 대해, 적군이 중심이 되어 이를 진압한 전쟁. 연합국은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강화 후, 사회주의 국가의 태도와 동부 전선의 형성을 기도, 무르만스크, 블라디보스톡, 기타에 군대를 상륙시켜 체코 군단의 반란을 구실로 병력을 증강함과 동시에, 우크라이나, 우랄, 시베리아, 카프카즈를 점령하고 있던 백위군에 무기와 식량을 공급하였다. 소비에트 정부를 공산당의 지휘하에 전시 공산주의 체제를 취하고, 적군을 조직하여 8~10월 동부와의 연락을 시도한 크라스노프 군을 차리킨에서 격퇴, 시작되는 동부 전선의 콜차크 군과 체코 군단의 공격, 남방으로부터 모스크바로 진군하는 데니킨 군 및 페테르부르크에 쳐들어온 유데니치 군의 추기 공격을 각각 격파 하고, 11월 콜차크 정부의 옴스크를 점령했다. 서부 전선의 폴란드 군과 크림의 브랑겔리 군의 공격을 격퇴, 중앙 아시아에도 소비에트 정권을 수립하여, 반혁명군은 극동을 제외하고 진압되었다. 소비에트 정부가 국내전에 승리를 거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의 적군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혁명에 의해 토지를 소유한 농민이 이를 지지하였으며, 국내의 제 민족이 짜아리즘을 타도한 소비에트 정부를 지지하였기 때문이었다.

 국민 공회는 프랑스 혁명기의 의회. 사건에 의하여 왕권이 정지된 결과, 신헌법 제정을 위해 보통 선거에 의하여 소집. 입법 의회의 뒤를 이어 성립하였다. 의원 총수 749명, 당파로서는 지롱드 당 , 몽타냐르 약 2백명, 중간파 약 4백명의 세 갈래로 나뉘었고, 다음의 3시기로 구분된다.

 지롱드 당 공회개회 직후 왕정의 폐지를 선언을 수립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했는데, 국왕의 재판 문제를 비롯하여 많은 점에서 지롱드 당과 몽타냐르와의 항쟁은 치열화하고, 국와의 처형, 식량난, 물가고, 대영 전쟁의 위기 등에 직면하였다. 이러한 문제를 위요한 양파의 항쟁은 마침내 발전하여 지롱드당의 실각을 초래했다. 몽타냐르 공화:먼저 헌법을 제정했는데, 내외의 위기에 대응하여 공안 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몽타냐르의 독재를 강화하여 에베르파, 당통 파를 숙정학, 로베스피에르 파의 독재가 확립되었다.

 네르미도라파 공화:테르미도르 9일의 사건으로 몽타냐르가 몰락, 다시 지롱드 당이 대두, 독재 대신으로 정치적 경제적 혼란이 생겼다. 헌법 재정으로 총재 정부를 설립하고, 해산되었다.

쟝 제스를 수반으로 난징에서 수립된 정부. 국민 정부의 변천을 크게 3분해 보면. 제1기는 국민 혁명 시대의 혁명 정부로, 그 세력은 꽝뚱에만 국한되었던 것이, 중화 민국 국민 정부라 일컫고, 북벌이 진전됨에 따라 그 세력도 확대되어 갔다. 제2기는  쟝 제스가 난징에 국민 정부를 조직하고 부터이며, 항일 전쟁 중 충칭에 이동했다가  종전과 더불어 난징에 돌아와서, 다시 난징 함락 후 타이완으로 이동한 시기이다. 제3기는 타이빼이에 정착한 뒤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를 말한다. 국민 정부를 북벌에 성공한 뒤, 훈정 강령을 공포하여, 정부기관을 정비해서 행정 입법 사법 고시 감찰의 5원을 설치하고, 내정 외교 군정 재정 등의 10부를 설치하였다. 쑨 원의 건국 방략에 따라 북벌을 완성하였기 때문에 군정기는 끝났으나, 국민은 아직 정권을 행사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정권은 국민당이, 치권은 국민 정부가 담당하게 되었다. 그러나 의회는 소집되지 않고, 국민당대회가 의회의 권한을 대행하여 일처의 결정권을 가졌으며, 정부 기관의 중요한 자리는 국민당원이 독점하고, 완전한 국민당만의 1당 정치를 하였다. 공산당과 합작도 하였으나 결별되고, 그 후 공산군 토벌과 일본의 만주 침략 등으로 정치 경제 등 시책에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항일 전쟁 중에는 다시 공산당과 협력하여 일본군과 싸웠으나 공산당은 보다 자체 세력의 강화에 역점을 둔 결과 전후 공산당 세력이 강대해진 반면, 국민당은 부패하여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끝내 중국 본토에서 타이완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국민 회의파는 인도 최대의 정당. 봄베이에서 제1회 대회를 개최한 전 인도 국민 회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초기에는 인도 각지의 지식인 관리 교육자 상인 지주 등 중간 계층을 주제로 하여 1년에 한 번씩 대회를 여는 정치적 집회였던 것이다. 그 결성에 있어서는 영국인 A.O.흄이 유력한 발기인의 한 사람이었고, 힌두 교도 이슬람 교도 및 크리스트 교도까지도 포함되어 영국 정부에의 충성과 이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인도 국민의 정신적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 측면에 있어서의 점진적 개혁을 도모하는 것을 목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제국주의적 지배 확립과 인도의 민족적 의식이 확대됨에 따라서, 차차 정당적인 색채를 띠게 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벵골 분할령 발표를 계기로, 이른바 과격파에 의한 저항이 높아졌고, 이듬해인 켈커타 대회에서는 스와라지, 스와데시, 보이코트, 국민 교육의 4대 강령이 채택되었으며, 그 후 영국에 의한 인도 통치법 개정이 있을때마다 자치 획득 운동을 강력히 벌였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귀국한 간디의 지도에 의해, 불복종 비협력의 저항 방식이 전국적으로 퍼지게 되고, 그 후 회의파의 지도자들은 계속해서 체포 투옥되었다. 마드래스에서 열린 연차 대회에서는 처음부터 완전히 독립할 것을 결의, 이듬해 다시 간디의 지도하에 비폭력 이념으로 광범위한 저항 운동이 벌어졌다. 이와같이 회의파에 의한 민족 운동은, 간디의 실천을 계기로 일반 대중들이 동원되었고, 또한 제1차 세계 대전으로 급속히 성장된 인도 민족 자본가층의 지지까지도 얻게 된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네루를 비롯한 지도자층의 투옥이 계속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그 활동을 사실상 정지당했으나, 전쟁이 끝나고, 독립 전후에는 회의파들이 새로운 내각을 조직하여 중앙 주 정치의 정권을 잡게 되었다. 네루를 중심으로 하는 회의파 정부는 사회주의에 입각한 인도의 독자적인 방식을 정면으로 내세우게 되었다. 회의파의 조직은 말단의 촌락에들도 서부터 지구 주 전국 위원회를 두어 민주주의적 체제를 갖추고 있으나, 당원 지도자 등에는 옛 지배층이나 정통파 힌두교도들도 포함되어 사회적인 복잡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네루 수상에 이어 수상적에 취임한 샤스트리수상이 타시켄트에서 급서한 뒤, 국민 회의파는 네루 수상의 영에 간디 여사를 수상으로 선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