뵈른손은 노르웨이의 시인. 소설가. 극작가. 입센과 쌍벽을 이루는 북유럽에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작가. 젊어서부터 국민 작가로서 유명했으며, 그뒤에도 계속 국민의 지도자 교육자로서 폭넓은 활동을 벌이고 국제 무대에서도 약소 민족을 위하여 진력, 인도주의의 전사라고 불렀다. 목사인 아버지의 전근으로 풍광이 명미한 롬스달 지방에서 자라, 중학 시절부터 시를 썼다. 혁명에 감격하여 지방 신문에 기고한 것이 저어널리즘에의 첫 등장이었다. 수도 크리스티아니아에 나와 예비교에 다니면서 입센과 친구가 되었고 크리스티아니아 대학에 들어가 학생 운동 연극 개혁 운동에 열중하다가 얼마 안 되어 퇴학, 25세에 스스로 국민 신문을 창간하고 여기에 창작과 평론을 발표하였다. 처녀작의 희곡 싸움의 틈틈이에 를 쓰고, 또 청춘 소설 양지바른 언덕의 소녀를 발표해 문명을 날렸다. 이 때부터 3년간 베르겐 극장 지배인 겸 신문의 주필이 되어 종횡으로 활약, 아르네 행복한 소년 등의 서정 어린 소설을 쓰고, 후에 국가가된 그렇다 우리들은 이 나라를 사랑한다 등의 시를 발표하였으며, 한편 신문 편집인 교육자로서 노르웨이의 무관의 제왕이라는 칭호를 받고, 시인 연금을 받아 여러 차례 외유하였다. 그 동안의 작품으로 희곡 신혼부부, 소설 어부의 말, 시집 시와 노래등의 우수작이 있고, 유럽 최초의 사회극, 파산과 문제극 편집자 등의 작품을 내었다. 이 밖에도 신의 길 위에서, 도시와 항구에 깃발이 등 많은 작품이 있다. 그는 그의 가장 급진적 경향을 띠운 시대에 있어서도 위고풍의 박학 정대한 휴머니스트였으며, 사랑과 화해의 신뢰자였다. 만년에는 당시에 강대 민족의 압박하에 있었던 핀란드나 체코 민족을 위하여 분투하고, 또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졸라를 성원했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그 후 파리에서 객사했는데, 노르웨이 정부는 군함을 보내어 그의 유해를 맞아다가 국장을 지내었다.
부르센샤프트는 해방 전쟁후 독일의 대학생이 결성한 단체. 처음엔 출신 지별 단체를 대신하는 것으로 조직되어 정치적 의도는 없었으나, 비인 체제하에서 점차 반동 정치와 대결하여 되어 자유 명예 조국이라는 표어를 내걸고 자유 통일 운동의 선두에 서게 되었다. 예나 대학에서 처음 창설된 후 각지의 14개 대학이 가입, 야안의 체조회도 합류하여 야안도 유력한 지도자가 되었다. 검은 복장에 붉은 깃을 단 제복을 입고, 독일 통일을 나타내는 검정 빨강 금빛으로 된 3색기를 사용하였다. 바르트부르크 숲에서 루터의 종교 개혁 3백년제와 라이프찌히 전승 기념을 겸한 제전을 개최하고, 전독일 부르센샤프트를 창설하여 반동에 대한 투쟁에 기세를 울렸다. 그 후 극좌파인 잔트가 반동적이며 통일의 적으로 간주한 코쩨부를 암살하고, 또 다른 암살 사건도 있어 메테르니히의 주창으로 된 카를스바트 결의로서 부르센샤프트는 금지되고, 더욱 자유 통일 운동까지 탄압되었다. 금지된 후 비밀 결사적인 청년 동맹 등의 이름으로 급진적인 경향을 나타내고 되고, 현실 정치적인 방향으로 진전하였으나, 모두 지난날의 위력을 찾아볼 수 없고, 겨우 함바하의 제전 등에 참가함에 그쳤다. 다시 바르트부르크 제전을 개최하여 독일 학생 전체 위원회가 조직되었으나, 혁명의 퇴조와 함께 세력이 쇠퇴하여 출신지별 단체의 성격으로 되돌아갔다. 그 뒤 비스마르크 시대에는 학생 아니제나하대회가 열려, 전 대표자 집회 등이 조직되어 그들을 넓은 뜻으로 부르센샤프트라 부르나, 비인 체제하, 3월 전기 때와 같은 정치적 의의는 없고, 나찌스에 의해 완전히 소멸되었다.
부병제는 6세기 중엽부터 8세기초까지 행해졌던 중국의 병제, 자영 농민 중에서 선발된 병사가 그 지방의 군부에 소속되어 국군을 형성한다. 한의 병제는 병농 일치를 원칙으로 하여 모든 장정이 병역을 담당했는데, 위 진 이래 호족에 의한 토지와 군사력의 사유화가 진행되어 국군의 제도도 천민화한 병호에 의하였다. 병호제는 북위말의 내란으로 타격을 받아 병사의 신분 향상에 의하여 부국 강병을 피할 필요가 생겼다. 서위는 이런 필요에서 북족 출신자 외에 한인 농민을 대량으로 채용하여 96군부에 배속, 이를 중앙24군에 소속시키고, 최고 지휘관으로서 육주국을 두었다. 수 당은 이 제도를 계승 발전시켜 전국 통일을 이루었다. 당제에서는 3년에 1회 신체 건강하고 호내 노동력이 많은 장정을 선발하여 노남이 되면 면제하였다. 피선발자는 당지의 절충부에 소속된다. 부의 병력은 상부 1,000, 중부 800, 하부 600이 표준이다. 상부에서는 화 10명, 대 50명, 국 200명, 부 1,000명의 부대 구성을 이루며, 지휘관으로서는 각기 화장 대정 교위 절충도위를 두었다. 또 부대정 여수 파의도위의 부관을 두고, 그밖에 문관을 두었다. 부병 총수 60만, 군부 총수 630이상이었다고 하며, 관중이 가장 많고 하동이 그 다음이었다. 각기의 군부는 중양의 12위 및 동궁육솔부에 속한다. 병사는 평시엔 가정에 있으며 농한기에는 부에 소집되어 훈련을 받지만, 1개월 내지 2개월씩 교대로 수도의 경비에 임한다. 이를 번상이라 하며, 번상의 병사를 위사라고 한다. 재역 기간중 1회 변경의 진 수에 나가 경비를 맡는데, 기간은 3년, 그 병사를 방인이라고 하였다. 부병은 조용조 전부를 면제받으나, 일정한 식량과 무기는 자기 부담이었다. 이러한 체제를 보중하는 것은 군전제있는데, 그 와해에 따라 고중 때쯤부터부행제도 무력화하였고, 한편 중앙 변경에 있어서의 군대 강화의 필요에 따라 변력의 공급원을 무산민에게서 구하는 용병제를 채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