멘델스존은 독일의 작곡가. 함부르크의 유복한 가정에서 출생. 17세에 이미 한 여름밤의 꿈의 서곡을 지었다. 피아니스트 작곡가로 활약하는 한편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여 괴테 등 교양인과 교제하고 같은 유다인의 희극 배우와 협력하여 쩰터의 지도 아래 바하의 마태 수난곡을 100년 만에 부활, 상연하였다. 라이프찌히에 음악 학교를 창립하고 슈만과 같은 우수한 예술가를 초빙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무언가 바이올린 협주곡 핑갈의 동굴 스코틀랜드 교향국 피아노 3중주곡 현악 4, 5, 7, 8 중주곡 이탈리아 교향곡 등이 있다.
멘도시는 에스파니아의 식민지 건설자. 카를로스 5세로부터 라플라타 강과 마젤란 해협 사이의 군정장관에 임명되고, 1,200명의 원정대를 거의 자비로 편성하였다. 부에노스 아이리스에 아르헨티나 최초의 식민지를 건설했으나, 본국이 필요로 하는 금은을 얻지 못하고 실의속에서 죽었다.
모계제는 인간관계의 질서를 정하는 원리의 하나는 혈연관계인데, 모계제는 그 중의 하나로서 신분 혈통을 어머니 쪽에 의해 결정하여 어머니 쪽의 재산 지위 특권 등을 상속하는 원리는 말한다. 모오간은 고대 사회를 저술하여 원서 사회에서는 먼저 모계제가 나타나고, 사회의 진전에 따라 부계제로 바뀌었다고 풀이한 후부터 모계제는 부계제에 선행하였다는 설이 유력해졌다. 그 원인으로 원시미개 사회에 있어서의 어지러운 성생활이 생각되었으나, 원시 사회에 있어서도 1부 1처의 가족 생활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모오간적 견해를 그대로 승인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개 사회에서 계보를 따지는 데는, 모계를 따른다는 것이 납득하기 쉽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도 여자가 농사를 지어 여자의 사회적 지위가 높았다는 사실과 결부되었을 때의 경우이다. 원시 미개라고 말하지만 수렵이나 유목 민족에는 모계제는 거의 없고, 있었다 해도 본래적인 것이 아니고 가까운 모계제 사회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모로코는 아프리카 대륙의 서북부에 위치한 왕국. 수도는 라바트. 지브로울터와 마주 대하여 대서양과 지중해의 접점으로서 통상 및 군사상 극히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그 대부분은 프랑스의 나머지는 에스파니아의 보호령이었으며, 탕헤르 주변은 국제 관리 지구였다. 주민의 대다수는 이슬람 교도인 무어인이다. 고대에는 마우레타니아 왕국의 일부였으나,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5세기에 반달족이 침입. 6세기에는 다시 비잔틴 제국이 정복하였으나, 아라비아인이 침입하여 지배권을 장악, 이슬람화되었다. 아라비아인은 다시 이 곳을 거점으로 에스파니아에 진출하였다. 8세기 말 시아 파의 이드리스 왕조가 성립하여 패스를 수도로 하였으나, 10세기초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에게 굴복하였다. 11세기에 들어서서 재차 독립을 회복하여 무라비트 왕조, 무와히드 왕조가 연달아 들어섰고, 양왕조는 모두 에스파니아의 이슬람 교도를 지배하여 서유럽의 크리스트교국에 대항하였다. 그 후 배르베르인의 왕조 등이 성립, 서방과 남방에 영토를 확대하여 16세기말에 최대의 관도를 형성하였다. 유럽인의 진출은 15세기부터 시작하여 16세기초 포르투갈은 연안의 전도시를 점령하였으나, 그 후 반격을 받아 이를 상실하였다. 이에 반하여 에스파니아인은 델릴라를 점령, 이후 지중해 연안 지대를 확보하였다. 유럽인의 진출에 대하여 모로코의 주민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북 연안에서 해적이 되어 대항하는 자가 많았다. 19세기 후반 유럽 제국과 통상 협정을 체결, 마드리드 국제 회의에서 모로코에 있어서의 제국의 권리 및 모로코의 술탄의 주권이 인정되었으나, 제국주의 열강 특히 영국, 프랑스의 격렬한 경쟁 대상이 되어 에스파니아는 북부 해안 지대를 이익 범위로서 인정받았다. 또 동년 영 프 협상에서 프랑스의 우월군이 협정되어 프랑스의식민 정책이 진척되었고, 독일과의 모로코 문제를 극복하여 보호국으로 삼았다. 또 분쟁이 있던 탕헤르 주변은 중립지대로서 국제적 관리를 받게 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유럽인의 지배에 대한 주민의반항이 격화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 때는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작전의 거점이 되었으나, 전후 모로코의 보호권 폐지 운동은 점점 강화되어 종종 폭동을 일으켜 프랑스, 에스파니아를 괴롭힌 끝에 마침내 독립을 인정받게 되었다. 국제 연합이 가입하였고, 모로는 왕국이 되었으며, 모하메드 5세의 사후를 이어 그 아들 핫산 2세가 즉위하였다.
몽고는 몽고족에 관힌 기록은 어미 당시대의 중국측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민족이 역사상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3세기 초엽 징기즈칸에 의하여 몽고 제국이 형성된 뒤부터이다. 징기즈칸은 오는, 케를렌 양강유역에 거주하던 몽고부 출신으로, 타부족인 타타르, 메르키드, 케레이트, 나이만 등을 정복하고 몽고족이 고원 지대의 모든 유목민을 지배하여 유럽과 아시아 대륙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점유하여 형성되었다. 그리하여 장자 주치에게는 아랄 해 북방과 남러시아의 스텝 지대를, 차자 차가타이에게는 중앙 아시아와 신장 지방을, 삼자 오고타이에게는 서북 몽고를, 막내아들 틀루이에게는 몽고의 땅을 각각 분할 통치하게 하였다. 이 가운데서 앞의 3자는 킵차크 한국 차가타이 한국 오고타이 한국을 세웠고, 막내인 블루이 계통은 쿠빌라이에게 계승되어 원조로서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리하여 몽고국은 원조를 종주국으로 하여 구성된 연합 왕국의 체제를 취하였다. 14세기 중엽 명에 의하여 중국 내지로부터 쫓겨나온 원은 그 뒤 북원이라 칭하고, 동북 몽고 지역에 은거하다가 명의 영락제의 원정으로 일시 쇠퇴하였다. 그러나 이를 대신하여, 서몽고의 오이라트부가 강대하여져서 명을 침공하여 영종을 사로잡고 빼이징까지도 위협하였다. 타타르 부가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명을 공략하였으나, 강화하였다. 청이 일어나자 태종은 내몽고를 복속시켰으나, 외몽고는 여전히 독립을 유지하였다. 그 후 오이라트의 후예 증가로 부가 강대하여지더니, 외몽고 칭하이 티벳동투르키스탄 등지를 점유하여 다시 강대해진 이들은 청을 침공하다가 도리어 패배하여 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 후 신해 혁명이 일어나자, 외몽고는 러시아의 힘을 빌어 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과 자치를 선언하고, 다음 해 러시아와 러 동 조약을 체결하였으나 중국측의 반대로 폐기되고, 러 몽 중 삼국간에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조약의 체결로 중국은 외몽고에 대한 명목상의 종주권은 회복되었지만, 외몽고는 사실상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러시아에 10월 혁명이 발발하여 외몽고에 대한 러시아 세력이 약화된 틈을 노려, 중국은 외몽고의 자치제를 취소하고, 그들의 세력권 아래 두는데 성공하였다. 몽고 인민 혁명당의 수르바토르 초이발산등이 혁명을 일으켜 활불 보크드게겐을 원수로 하는 입헌 군주국을 세웠다. 명목상의 원수이던 보크드가 죽자, 소련의 무력을 배경으로 인민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중화 민국 정부가 몽고의 독립을 정식으로 승인하였으나, 성립된 중공 정권이 몽고를 승인하고 국교를 맺자, 중화 민국은 독립 승인을 철회하였다. 국제 연합에 가입하고 중공과 국경협정을 체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