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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 마인쯔,그리이스 마케도니아, 마케도니아 전쟁, 이탈리아 맛치니

마인쯔는 서독의 라인란트에 있는 고도로서 라인강과 마인 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위치한다. 그 기원은 BC. 13년 로마의 장군 드루수스에 의하여 건설된 보성에서부터이다. 중세에는 종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독일 제1급의 중요 도시였다. 대주교의 거주지가 되어, 그 대주교는 독일의 약 3분의2의 크리스트 교회를 지배하는 큰 존재가 되어 역대 국왕으로부터 각종의 특권 및 많은 영지를 부여받았다. 대주교는 또한 정치적으로도 큰 역할을 하여 독일 재상의 위치를 점하고 황제 선립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그 선제후로서의 지위는 황금 문서에서 확인되었다. 또 경제적으로는 쾰른과 함께 라인 지방 상업의 중심지로서 라인 도시 동맹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나 차차 번영의 중심은 프랑쿠푸르트 암 마인으로 옮아갔으나, 19세기 후반 라인강 기슭에 벨기에, 루우르, 상라인 지방, 스위스를 잇는 철도가 완성되자, 마인쯔는 중세 이래의 침체를 깨뜨릭 활력을 되찾아 기계 공업 화학 공업 시멘트 공업이 발흥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연합군 공군의 공격을 받아 시가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전후에는 프랑스 군의 관리 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이스 반도의 동북에 위치한 지방. 신석시 시대부터 주인이 정착하여 청동기 시대에는 통일적인 문화를 갖게 되나, 미케네 문명의 영향은 적다. B.C 북방 민족의 침입을 받아 그 때 침입한 도리스인이 아마도 나중의 마케도니아인의 중핵을 형성한 듯하다. 그 후에 점차 남동진하여 B.C 6세기 중기 마케도니아 평원을 점령하고, BC5세기의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페르시아측에, 펠로폰네소스 전쟁엔 스파르타측에 가담하여 주위의 나라들과 싸웠으나, 아르켈라오스 왕은 군비를 충실히 하고, 그리이스 문화를 수입하여 국력을 배양하였다. BC359년 필립포스 2세가 즉위하여 내란을 진압, 군대를 정비하면서 그리이스에 간섭을 시작하였다. BC 델포이 신전을 둘러싼 그리이스 내분을 진압하고,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을 격파하여 전그리이스를 지배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BC 페르시아 원정에 올라 이를 멸망시키고, 동서 세계를 통일한 대제국을 건설했다. BC대왕의 사후제국은 분열하여 마케도니아는 한때 캇산드로스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나, 안키고노스의 수중에 넘어간 후 그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후 세 번 로마와 싸웠으나 패하여 BC 이후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문화적으로는 그리이스 문화와 헬레니즘 문화와의 매개자로서 역사적으로 큰 의의를 남겼다.

 마케도니아 전쟁은 제2 포에니 전쟁에서 한나발이 로마와 혈루하는 동안,마케도니아 왕 필립포스 5세는 한니발과 결연하고, 로마는 이에 대비해서 그리이스의 제 도시, 트라키아의 호족 및 페르가돈 왕 앗틸로스 1세와 맹약하여 필립포스의 배후를 위협하였으므로, 필립포스는 한니발에 대한 원군을 이탈리아 전장으로 보낼 수 없게 되어, 대신 BC 자마 싸움에 용병을 보내 주었다. 제2회:그 후 필립포스는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 3세와 동맹을 맺고 이집트와전쟁을을 일으켜 주위의 각국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페르가몬 왕 앗탈로스 1세 아테네 로도스의 여러 도시들은 로마에 원군을 청하였다. 로마 군은 일리리아에서 마케도니아의 배후를 찌르고, 또한 해상으로는 유비아 섬을 습격하여 필립포스를 아테네의 전면에서 격파하여 점차 마케도니아의 세력을 그리이스로부터 구축하고, BC 뎃살리아의 키노스케팔라에 싸움에서 승리하였다. 필립포스는 화해를 청하여 마케도니아 본토 이외의 모든 영토와 그리이스에 대한 패권을 포기했다. 또한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군인은 5천, 군선은 5척으로 제한하였으며, 이후의 대외전에서는 로마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는 약속을 하였다. 제3회:필립포스의 아들 페르세우스는 그리이스에 대한 종주권을 회복하려 하였다. 이에 로마는 페르가몬 왕의 소청을 받아 그리이스북경 텟살리아에 출정했다가 실패하고, 또한 일부 그리이스인에게 위신을 잃었으나, 용장 파울루스가 분기, 출격하여 피드나 싸움에서 결정적 승리는 거두었다.

맛치니는 이탈리아의 혁명가, 정치가 저작가. 제노바에서 출생, 제노바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낭만주의와 고 로마 공화국에 대한 동경의 일념으로 오스트리아의 압정으로부터의 해방과, 조국 통일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 운동에 가담했다. 처음에는 문학 활동만을 하였으나, 카르보나리 당에 가입, 중요한 지위를 맡았다. 반란 기도죄로 체포되었다가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후에 마르세이유에 망명, 카르보나리운동의 결점을 반성하고, 신에 대한 신앙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를 기조로 하는 일반 민중에 의한 혁명운동을 일으키기 위해 청년 이탈리아 당을 결성하고, 그 기관지를 통해 애국심을 고무하는 한편 혁명운동을 지도하였다. 둥지 3천 명과 함께 사보이 진출을 기도했으나 실패하고 도망하여 스위스에서 유럽 청년당을 결성하였다. 영국으로 건너가 해방 운동에 전념 밀라노 혁명에 참가하고 다음 해 토스카나 임시 정부에 참여하여 로마 공화국의 삼두 정치의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로마 공화국이 백일 만에 궤멸되자 재차 런던에 망명하였다. 이후 카부르의 사르테나 중심의 왕당적 현실 정책이 독립 운동의 주류가 되어, 그의 영향력은 차츰 줄어졌으나 저작에 의한 공화국 통일에 노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