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동남 아시아 제국 연합, 동독일 식민 운동, 동슬라브족 민족 이야기

동남 아시아 제국 연합은 말레이지아, 필리핀, 타이의 3국에 의해 설립된 동남 아시아 연합이 발전적 해체를 한뒤를 이어받아, 방콕에서 열린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필리핀, 싱가포르, 타이의 5개국 외상 회의에 의하여 설립된 동남 아시아의 협력 조직, 경제적 사회적 안정 강화 및 그 평화적 진보적인 국가 개발의 제1차적 책임을 분담할 것을 제창함과 안정과 안전을 지킬 결의를 가질 것. 또한 모든 외국 기지가 잠정적인 것이며, 관계국의 동의하에 유지되어야 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최고기관은 외상 각료 회의로서 매년 1회 개최되며, 상설 위원회 전문 위원회 사무국이 있다. ASA와의 연속적 성격이 현저하지만, 인도네시아의 가맹으로 인하여 동남 아시아의 지역주의의 조직으로서의 획기적인 포괄성을 갖추게 된 것과 필리핀과 말레이지아와의 분쟁으로 활동이 마비되었던 ASA와는 달리 지역내 분쟁해결이나 평화 유지면에서의 능력이뛰어나서 동남 아시아의 안정에 공헌하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르다 하겠다.

동독일 식민 운동은 중세기에 있어서의 독일 민족의 동방 및 동남방으로서의 식민 운동 및 경제적 문화적 개발 운동, 이로써 슬라브족과의 경계선을 넘어 발트 해 연안의 여러 지역을 에스틀란트까지, 동부에서는 오데르 강을 넘어 폴란드 국내까지, 동부에서는 오데르 강을 넘어 폴란드 국내까지, 동남부에서는 헝가리 국내까지 독일화 크리스트교화하였으며, 다수의 독일 촌락, 그 위에 독일법에 의거한 도시를 건설하였다. 이 민족적 운동의 효시는 이미 카알 대제 하인리히 1세. 오토 대제 등의 동방 경영에서 볼 수 있으나, 10세기말 밴드족의 반란으로 그 성과는 괴멸되고, 1세기 반에 가까운 공백기를 거쳐 12~14세기의 로타르 3세 및 시타우퍼 왕가 시대에 재개되었다. 이를 추진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변경 제후, 수도원 교단 독일 기사단, 한자 및 동방의 토착제후이며 대개 기사의 이주에 따라 다수의 농민이 로카토르의지도하에 서부 독일, 네덜란드 등 인구 과잉에 허덕이는 지역으로부터 모여들었다. 이주 농민은 서부 독일보다도 유리한 조건을 얻었다. 14세기 중엽부터 식민 운동은 점차 정체되고, 동독일  일대에는 구츠헤르샤프트가 지배적으로 되어 농민의 지위를 현저히 악화되었다. 이에 관련하여 제2차 세계 대전 때, 히틀러의 동유럽 침입도 이 운동의 발현의 하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동방 문제는 오스만 투르크제국과 이집트와의 분쟁에 관련하여서, 투르크를 중심으로 발생한 유럽 열강의 국제 문제 제1차:투르크의 종주권 밑에 있던 이집트 태수 메호메트 알리는, 그리이스 독립 전쟁에서 투르크를 원조한 공적으로 크레타 섬. 키프로스 섬을 얻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독립 운동을 일으켜 시리아에 진격하였다. 이 기회에 러시아는 투르크를 원조하여 흑해와 지중해에의 진출을 기도했으나, 러시아의 진출을 두려워하는 영국과 프랑스가 기선을 제압하여 투르크에 간섭하고, 이집트와투르크를 원조하여 흑해와 지중해에의 진출을 기도했으나, 러시아의진출을 두려워하는 영국과 프랑스가 기선을 제압하여 투르크에 간섭하고, 이집트와 투르크 사이에 평화 조약을 체결시켰다. 그 결과 투르크는 이집트의 요구를 거의 전부 받아들여 시리아, 킬로키아의 퉁치권을 양도하였지만, 투르크는 이 조치에 불만을 품고 러시아와 웅키아르스켈렛서 조약을 맺어 흑해와 보스포러스 다아다넬즈 해협에서의 러시아 함대의 우선권을 인정하는 대신, 러시아 원조를 받을 것을 약속하였다. 제2차:매호메트 알리가 그 통치령에 대한 세습권을 요구하여 투르크군이 대패하였다. 영국은 프랑스가 지원하는 이집트의 강대화를 두려워하여 이번에는 투르크를 원조하고, 러시아, 오스트리아, 프로이센을 끌어들여 4국 동맹을 결성, 이집트에 간섭하여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이외의 전통 치령을 투르크에 반환하도록 통첩하였다. 여기에 대해 프랑스는 국제적 고립을 두려워하여 이집트 원조를 포기하였다. 메호메트 알리는 동맹국의  간섭을 거절하고 출병하였지만, 시리아에서 영국군에게 대패하여 전점령지를 포기하고, 부르크의 종주권하여 이집트 통치의 세습권만을 인정받았다. 동맹4국에 프랑스가 가담하여 런던에서 국제 해협 협정을 체결하였는데, 그 결과 러시아와 투르크 사이의 웅키아르스켈레시 조약이 폐기되어 러시아의 근동 진출의 야심이 좌절되고, 영국이 결국 동방 문제에서 가장 유리한 성과를 거두었다.

동슬라브족은 슬라브족중 최대의 부족. 대 러시아인, 소러시아인, 백 러시아인으로 구성되며, 현 소련 인구의 4분의 3을 점하고 있다. 그 기원에 대해서는 정설이 없으며, 7~8세기경 카르파티아 산맥의 동북 사면에서 러시아 평원으로 이동했을 것이라는 설과 토착민이라는 설이 있다. 현재는 후자의설이 유력하다. 3, 4~7세기의 남러시아 평원에 살던 안트인을 소련 사학자는 동슬라브족으로 보고 있다. 3~4세기의 남러시아 평원에 살던 안트인을 소련 사학자는 동슬라브족으로 보고 있다. 3~4세기에는 고트족, 훈족의 지배하에 있었으나, 5세기 중엽에 독립하였다. 6~8세기 아바르인의 공격을 받아 분산되었다가, 8~9세기에는 여러 종족으로 나뉘었다. 그드은 도네프르 강과 드네스트르강 유역뿐만 아니라, 동은 볼가 강과 오카 강 유역, 북은 일리메니 호 부근에 걸쳐 살았으며, 그 주요한 것은 키에프를 중심으로 한 폴레족, 그 북서의 드레브족, 더 북쪽의 드레고프족, 그 북서의 드레브족, 더 북쪽의 드레고프족, 체르니고프 부근으 세베르족, 스몰렌스크 부근의 크리브족, 노브고로드 부근의 일리메니 슬라브족, 키에프 서쪽의 두르베족, 스몰렌스크와 체르니고프 중간의 라디미치족 등이다. 류리크에 인솔된 노르만인이 노브고로드를 점령하고, 그 후계자 올레그는 키에프를 점령하여, 동슬라브족의 통일 국가인 키에프 루시가 건설되었다. 농업을 위주로 하고, 수렵 양봉도 하였으며, 드네프로 수제를 제압하여 비잔틴 무역을 하고 볼구 수계의 여러 유목민의 투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