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대법관,대 프랑스 동맹,데모스테네스, 데카르트,데키우스의 법과나라 사람등의 이야기기

대법관은 영국의 형평법 재판소의 장. 국새를 보관하고 있는 것이보통인데, 별도의 관직인 국세 상서를 둘 때도 있었다. 처음에 시작된 것은 14세기 에드워드 3세 때인데, 처음에는 성직자가 임명되었으며, 국왕부 목사겸 비서관으로 왕의 인장을 보관하였다. 노르만 왕조와 플랜타지네트 왕조 초기에는 대사법관의 밑에 있었으나, 헨리 3세 무렵부터는 수상의 지위를 차지하였다. 처음으로 사법을 맡아 보게 된 것은 헨리 2세 때이며, 이 때부터 국왕에 대한 모든 청원이그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법관은 학식 있는 인물. 특히 교회법 로마법 보통법에 능통한 인물이 선출되었다. 튜더, 스튜어트의 양왕조에서는 민사 소송의 면에서 왕권의 도구가 되고, 형사 소송 면에 있어서는 성실 재판소와 서로 호응하였다. 이 때문에 시민 혁명의 개시는 대법관 재판소의 쇠퇴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17세기 자연법의 유행으로 그 몰락은 면하게 되었다. 19세기가 되어, 이래 재판 제도의 획기적인 개혁이 행하여져서 대법관 재판소는 고등 재판소 중의 일부가 되었다. 오늘날 대법관은 재판관으로서 최고위를 점하는 동시에 상원 의장이다.

대 프랑스 동맹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1세에 대하여 연 7회에 걸쳐서 체결되었던 유럽 제국의 동맹. 1:프로이센, 오스트리아의 필니쯔 선언에서 시작되어, 루이 16세의 처형 후 영국, 러시아, 에스파니아 등이 가맹하였다. 프랑스와 프로이센, 에스파니아 사이의 바젤 화약. 사르테냐의 항복, 프랑스의 오스트리아 사이의 캄포포로미오 화약에 의해서 와해 되었다. 2:제1회 동맹이 와해된 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이 실패할 무렵, 프랑스와 계속 교전 관계에 있던 영국, 러시아, 투르크, 오스트리아, 양시칠리아 왕국 사이에 결성. 마랭고 싸움의 뒤,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뤼네빌 화약, 영국과의 아미앵 화약에 의해 해소되었다. 3:아미앵 화약에 의한 1년간의 평화가 있은 후, 영국의 피트가 다시 집권을 하게 되면서 추진되었다.  러시아 오스트리아 사이의 방어 동맹에서 시작되어, 영국과 러시아의 동맹, 오스트리아의 가입에 의하여 성립되었다. 전번 동맹에 비해 규모가 훨씬 크고, 또 이 동맹 조약이 뒤의 비인 회의의 기초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동맹군이 아우스테를리쯔 싸움에서 패한 후 프레스부르크 화약에 의해 오스트리아가 탈락되었다. 4:아우스테를리쯔 싸움의 실패와 신성로마 제국의 붕괴를 계기로, 프로이센과 러시아, 영국 사이에 성립되었다. 프랑스와 러시아, 프로이센 사이의 틸지트 화약에 의해서 붕괴되었다. 5:오스트리아와 영국간 체결되었다. 바그람 싸움 후 쉰브룬 화약에 의해서 오스트리아가 탈락하였다. 6:영국 러시아 동맹에서 시작하여 러시아 프로이센 동맹이 성립. 10월에 이르러서는 덴마아크를 제의한 거의 모든 나라가 참가하였다. 라이프찌히의 제 국민전쟁에서 동맹군이승리하여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7:전회의 계속으로 비인에서 결성되었다. 동맹국은 나폴레옹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위털러 싸움에서 그를 격파하여 나폴레옹 전쟁을 종결시켰다.

데모스테네스는 아테네의 대웅변가. 정치가. 부유한 사업가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찍 고아가 되고, 부친의 재산을 횡령한 후견인들을 고소하기 위해 수사학을 배워 유명한 웅변가가 되었다. 당시 트라키아 방면에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마케도니아의 필립포스 2세에 대한 공격 연설 제1 필립포스론을 발표, 아테네의 위기를 호소하여 두각을 나타내고, 그 뒤 윤린토스론에서 조국의 분기륄 촉구했으나 기대한 만큼의 효과를 얻지 못하자, 필로크라테스, 아이스키네스 등과 함께 마케도니아와으 화평 교섭을 벌여, 화평론에서 은인 자중할 것을 주장하였다. 제 2, 3필립포스론, 케르소네스톤에서 다시 대 필립포스 강경론을 주장, 정적 아이스키네스 등을 탄핵했고, 아테네를 주도하여, 숙적 테베와 동맹하여, 필립포스 2세와 결전했으나 카이스의 아테네이아 싸움에서 패배하였다. 전후 아이스키네스의 고발에 응답한 영광론은 앗티가 웅변술의 정수로 일컬어진다. 필립포스가 죽은후, 그리이스의 자유 회복을 기도했으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활약으로 때를 얻지 못하고, 마케도니아 제무관 하르팔로스의 아테네 망명을 도와, 수회죄로 문책받아 망명하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죽은 후, 반 마케도니아 운동을 전개했으나 실패하고, 아르골리스 동쪽의 칼라우리아 섬에 도망했으나, 추적을 받아 음독 자살했다. 작품 61편이 전해지고 있으나, 위작이 많다. 애국자로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의 철학자, 수학자, 자연 과학자. 근세 철학의비조. 라 에에서 출생. 제주이트교단의 학원에서는 논리학 형이상학 자연과학 스콜라학을, 프와티에 대학에서 법율학 의학을 배운 뒤 네덜란드 바이에른 군의 지원 장교가 되었다. 전쟁터에 있는 동안, 방법의 계시를 받았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음악의 수학적 연구를 완성하여  음악 제요를 출판하고, 이어서 중 남유럽으 ㄹ여행하고 세상이라고 하는 위대한 책을 배우는 한편, 브레다와 파리의 자연 과학자와 깊이 교제하고, 물리 수학 연구에 뜻을 두어 3차 및 4차 방정식의 근을 포물선과 원에 의하여 작도하는 것을 고안하였다. 정신 지도의 법칙을 쓴 뒤, 네덜란드 각지를 전전하고, 만년의20년간에 방법 서설 제일 철학 성찰 정념론을 완성하였으며, 정신과 물질의 2원론을 설파하였다. 그의 관념론은 말브랑시와 스피노자에게 계승되었다. 양식과 방법적인 회의에 인도되어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려고 하는 그의 합리주의는 18세기 계몽사상을 육성하는 풍부하는 지반이 되었다. 그는 단지 철학자로서뿐만 아니라 모릴리 스트로서도 중요하며, 그의 인생 철학은 근대의 자아 탐구의 시발점이 되었다.

데키우스는 로마 황제. 이탈리아의 시르미를 출신. 다뉴브 강반에서 관노니아 주둔군 사령관으로 있을 때 이탈리아 주재군의 옹립으로 황제가 되었다. 중세로써 국민을 괴롭혔고, 특히 크리스트 교도에게 잔학한 박해를 가했다. 로마 제국의 혼란을 틈타서 게르만인의제국 침입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동고트족이 모에시아, 마케도니아를 석권하였을 때, 이를 방어하려고 교전 중 모에시아 총독 갈루스의 반란으로 아담클릿에서 그의 아들과 함께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