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은 이 연이 수에 이어 세운 나라. 도읍은 장안. 다음의 태종 이 세민은, 안으로 중앙 집권을 확립하고 밖으로 광대한 영토를 확장하여 당조 300년의 기초를 세우니, 그의 치세를 정관의 치라한다. 제3대 고종이 죽은 뒤, 그의 황후 측천 무후는 정치를 전횡하다가 690년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주라 개칭하였다. 705년 당조는 다시 복고 되었으나, 중종의 황후 위씨의 전횡이 다시정치를 문란하게 하였다. 이 때 즉위한 현종은 정치를 개혁하여 국력을 충실히 하니, 당조는 다시 중흥되어 이를 개원의 치라 한다. 그러나 이윽고 현종은 정치에 싫증이 나 양귀비를 총애하고, 간신을 중용하여 정치가 문란해지고 천하가 어지러워져 급기야 안사의 난으로 발전하였다. 9년에 걸친 이 난은 당조 지배력의 쇠퇴, 번진 세력의 반독립 상태. 위구르와 토번 등의 침입. 환관의 횡포 등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는 황 소의 난이 일어났고, 농민 다수의 참가로 말미암아, 중국 전토로 번져 한 때 장안도 점령되었다. 이 난은 평정되었으나 전공을 세운 번진 절도사의 한 사람인 주 전충이 당조를 멸하였다. 당의 제도는 율령 체제로서 중서 문하 상서의 삼성과 육부의 제도를 정비하고 과거 제도를 확립시켰다. 균전제를 바탕으로한 조용조제와 부병제를 시행하였다. 안사의 난을 계기로 하여 균전법은 무너지기 시작하여 장원이 발달하였고, 가서는 양세법의 제정되었으며, 부병제도 모병제로 바뀌었다. 경제면으로는 북중국에 2년 3모작이 보급되었고 생산력이 증대하여 수공업 행상등이 발달하였다. 문화면에서는 중국 고유의 문화가 개화된 것 외에 외래 문화를 섭취, 동화하여 국제적인 성격을 띤 세계적 문화를 이룩하였다. 당의문화는 이와 같은 성격으로 말미암아, 동아시아 각국으로 용이하게 전파되어 큰 영향을 끼쳤다.
대간주는 영국 장기의회의 초기 장로파 의원들이의회에 제출한 사실상의 영국구질서 타도 선언. 이것은 의회내에서의 대논쟁을 거친 뒤 하원을 통과하였다. 중요한 조항의 내용은 비누 소금 주류 피혁 석탄 및 기타 모든 일상 생활에 필요한 상품의 특허, 거주 영업 및 기타의 권리르 행사하기 위한 영국국민의 제 자유를 억압한 것 등은 국왕 정부 실정의 한 예라는 것, 일반 상인의 이익이 독점 상인이나 투기업자의 이익때문에 희생되고 있다는 것, 영국 국교회의 감독 및 그 재판소가 많은 사람들의 생활을 불행 속에 빠뜨렸고, 이것을 피하기 위해서 어딘 자는 뉴우 잉글랜드 등 아메리카 지역으로, 그 밖의 다른 자들은 네덜란드 등지로 고국을 떠났으며, 아울러 이주지로 직포 설비를 옮겨갔는데, 이것은 오늘날까지의 영국 국민의 부와 명예의 원천이 되어 온 직포업의 발달을 위기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영국으로서는 큰 손실이라는 것 등으로서 차알스1세의 저대 왕정을 탄핵하고, 더욱 종교 문제에 대해서는 영국 국교회를 스코틀랜드 교회처럼 개혁하려고 한 의도가 보이며, 사적 개인 사적 신도 조합이 각자 자의로 예배 형식을 결정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카톨릭 교도에 대해서는 엄중한 검찰을 가하고, 모든 불법 행위는 재판소에 심판되며,재판관은 권리 청원과 그 밖의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것 등을 서약하도록 하였다.
대륙회의는 아메리카 독립 혁명기에 아메리카 13 식민지 및 독립 후의 각 주의 통일적 행동을 군사 외교 내정에 걸쳐서 지도한 기관, 정부라고 하기보다는 13 식민지의 대표로 구성되는 외교 회의의 성격을 지녔고, 각 대표는 자기의 식민지 정부로부터의 훈령을 가지고 출석하였다. 제1회는 열리어 아직 독립을 목적으로 하지는 않고, 식민지의 자유화 자치의 회복을 목적으로 했으며, 권리의 선언 반포 및 대륙 연합의 결성이 주요한 사업이었다. 제2회는 당초에는 식민지의 자치 회복을 목적으로 하고, 우선 무력 행동 선언을 발표, 6월에 워싱턴을 식민지군 총지휘관으로 임명하였으며, 7월에 평화 청원을 국왕에게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본국의 태도가 경화되자, 이듬해까지, 독립의주장이 급진파 사이에 강력하게 일어났고, 이어서 급진파의지도에 의해서 7월2일 독립 선언을 가결, 이후 독립달성에의 통일 지도체로서 각 식민지를 지도하였다. 제2회 대륙 회의는 존속하였고, 연합 규약 발효 후에는 연합 의회로 되었다.
대운하는 지금의 빼이징에서 항조우까지 중국의 동부를 종관하는 대운하. 전장 1,800km이며, 원 명때에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원형은 7세기초 수대에 뤄양을 중심으로 하여 동남과 동북으로 향하여 개착된 두 계통의 운하이다. 수 당시대에 동남쪽으로 뚫린 것은 뤄양에서 카이펑을 거쳐, 통제거를 따라 화이 허 강으로 들어가, 이에서 춘추 시대에 오가 개설한 한구로써 양쯔 강에 도달, 이 강의 남안에서 쟝난 하를 따라 향조우에 이른다. 또 동북은 뤄양에서 황하를 건너 영제구를 따라 텐진을 지나빼이징에 도달한다. 수의 운하는 당을 거쳐 송대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이용되었는데, 남송때에 화북을 금에게 점령당했기 때문에 남북의 연락이 끊겼다. 13세기 후반에 원이 중국을 통일하자, 빼이징이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남방의 물자를 수송할 필요에서 운하의 정비가 급선무가 되었다. 당시의 황하는 남류하여 화이허 강으로 유입했으므로, 남쪽의 항조우에서 강남 운하 양조우 운하를 지나 화이인에서 황하를 소강하여 카이펑부근에 도달, 육운을 이용하여 웨이허강으로 들어가 텐진으로 내려간다. 여기에서 육운의 불편을 없애기 위해, 산뚱의 쓰허강과 원허 강을 이용하여 화이인에서 따칭 하로 통하는 지조우 하 개착, 계속해서 뚱핑으로부터 린칭까지 후이동 하를 개착하여 웨이허 강으로 연락되게 했다. 그리하여 텐진으로부터 빠이허 강을 거슬러 통조우에 이르러, 그 곳에서 퉁후이 하를 개설하여 빼이징에 도달한 것이다. 명은 성조가 빼이징으로 천도하여 운하의 정비에 주력, 신종 때에 쉬조우를 지나는 우회로를 폐지하고, 화이인 지닝간의 직통 수로를 개착함으로써 현재의 대운하의 개통이 비로소 준공되었다. 청조도 또한 빼이징ㅇ 도읍했기 때문에 남방의 물자 수송에는 오로지 대운하가 이용되어 대대로 이 유지에 많은 노력이 경주되었다. 그러나 청의 말기에 이르러서는 해운이 왕성해지고 운하는 그 수리가 철저하지 못하여 막혀 버린 곳도 많아졌다. 현재에는 많은 개수가 실시되고, 수송 외에 관개에도 이용되고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