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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뉴브문화, 다아비 부자, 다이묘오, 단찌히 자유시 명칭 이야기

다뉴브문화는 중부 유럽에 널리 분포된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의 원시 농경 문화, 서 헝가리의 다뉴브 강 상류 지역으로부터 북방의 폴란드, 독일, 벨기에에 걸치는 광대한 황토 지대는 후빙기 이후, 산림은 별로 발달되지 못하고 농경에 적합하였다. 토지가 광대하여 일단 지력이 소모된 경지는 폐기해버리고, 차차 새로운 토지를 개간 경작하는 유목적 농경이 보급되었다. 화형상 석부를 가래로 사용한 원예적 농경법으로 밀 보리 완두콩 아마 등을재배하여 돌로 된 낫으로 추수하였다. 한편으로 가축을 소유하여 주로 소 돼지를 사육했다. 촌락은 울타리나 도랑으로 둘러싸고, 방형의 수혈 주거를 지어 회반죽으로 벽을 바르고 맞배지붕으로 덮었으며, 곡물을 넣는 창고도 있었다. 이 문화는 대체로 4기로 나뉘는데 제1기는 북독일, 헝가리, 폴란드, 벨기에에 분포한다. 토기는 양질의 점토를 환원염으로 구운 구형 또는 반구형의 주발과 항아리가 많고 와문과 뇌문으로 선각되어 있다. 제2기의 문화는 다뉴브 강 중류 지역, 하 바이에른, 중부 독일, 실레지엔, 길 러시아에 분포되어 있다. 농경 가축과 더불어 전대에는 별로 볼 수 없었던 수렵도 부활되었다. 토기는 고매 평저의 주발과 단지가 나오며, 와문과 뇌문 외에 초벌구이를 한 다음에 하양 빨강 노랑으로 착색한 것이 있다. 여성 동물 등의 토우도 있다. 제3기 에는 인구도 증가하여, 북방의 성두부 문화인, 서방의 벨 비이커인 등과의 접촉도 이루어져 혼성 문화가 되었다. 또 일부는 자연동의 고타법에 의하여 도끼가 만들어졌다. 제4기는 청동기 문화이다.

다아비 부자는 영국의 정치가 아버지는 하원 의원이 되고, 휘그 당에 소속하였다. 그레이 내각의 아일랜드 사무 대신이 되어 선거법 개정을 지지하였고, 식민상이 되었으나 아일랜드의 종교 문제에 관한 의견의 대립으로 사직하였다. 휘그 당을 떠난 뒤 보수당에 입당하였다. 제2차 피일 내각의식민강에 취임했으나, 내각이 세론에 따라서 행한 곡물법 폐지에 반대하여 사직하였다. 상원으로 옮겨 보수당의 유력한 영수로서 활동, 3회에 걸쳐 조각하였다. 제3차 내각 때에는 세론의 지지를 얻으려고 제2차 선거법 개정을 행하여, 도시 노동자의대부분에게 선거권을 주었다. 헨리는 그의 장남인데, 하원에 들어가 보수당에 소속했지만, 그의 입장은 부친보다 훨씬 자유주의적이었다. 부친의 제1차 내각의 외무 차관, 총제가 되고, 영국 정부의 인도 직접 지배를 규정한 인도 통치법안을 성립시켜, 초대 인도 사무상이 되었다. 부친의 제3차 내각의 외상을 역임한후 작위를 세습받아 상원에 들어갔다. 디즈레일리 내각에서 외상이 되어 수에즈 운하주 매수 등에 수완을 나타냈으나 보수당의 적극 외교 정책과 맞지 않아 사임. 그 뒤 자유당으로 옮겨 제2차 글래드스턴 내각의 식민상이 되었다. 아일랜드 자치법안에 반대하여 탈당하였으며, 체임벌린 등과 자유 통일당을 결성하여 이를 영도하였다.

다이묘오는 일본에서 일반적으로 에도 시대의 부쿠한 체제하의 번주를 다이묘오라고 한다. 그 연원을 더듬으면 중세의 묘오덴제에 있어서 이미 다이묘오, 쇼오묘오라는 호칭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묘오덴의 다과를 나타내는 말이었으나, 그것이 점차 변화하여 묘오덴제가 붕괴된 후에도 토지나 백성을 영유하여 지배하는 권력자 곧, 무사의우두머리를 다이묘오라고 불렀다. 특히 남북조, 무로마치기에는 한 고을 또는 여러고을을 지배하는 슈고를 수고 다이묘오라고 일컫게 되고, 전국기에 들어가면 이들 슈고 다이묘오는 두세 다이묘오를 제하고는 몰락하고, 새로운 근세적인 다이묘오가 태어났다. 이들 다이묘오는 묘오슈나 쇼오칸의 토지 지배를 부정하고 전영국을 영지의 곡물 수확고에 의하여 표시하게 되고 넨구 수취를 목적으로 하는 검지가 행하여졌다. 이와 같은 다이묘오의 영국 지배는 에도 바쿠후의 체제 속에 짜여져 바쿠한 체제의 기본적인 체제가 되었다. 에도 바쿠후는 각 다이묘오에게 영국을 주어 그 영국내에 있어서의 행정 사법 징세권의 행사를 인정하는 동시에 바쿠후의 신가라는 입장을 취하게 했다. 그리고 영국은 명확히 석수로써 표시되며, 이봉 감봉 폐절의 대권은 바쿠후가 장악했다. 석수가 1만 석 이상의 것을 다이묘오라고 하며, 그 가신은 바쿠후에 대하여 배신의 관계에 있었다. 그러므로 설혹 배신이 만석 이상의 대우를 받아도 다이묘오라고는 하지 않는다. 또 다이묘오는 토쿠가와 가문과 혈연이나 역사적 관계에 의하여 신판 후다이 토자마의셋으로 대별되며 이에 따라 관위의 승진 성중의 석차가 달랐다. 바쿠후의 다이묘오에 대한 과역은 주로 군역이며, 이는 석수에 의하여 극히 상세하게 규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에도 성내의 경비, 중요한곳의 소화 임무, 나가사카 경호, 토목 공사의 부과 등이 있으며, 그 부담은 무거웠다. 그 중에도 볼모 제도를 동반한 산킨코오타이는 번의 재정을 좌우할 정도로 과중한 출비가 되어, 여러 다이묘오를 괴롭혔다.

단찌히 자유시는 발트 해 남안에 있는 옛 독일 항구에 대한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명칭. 지금은 폴란드에 속하며 그다니스크라 불린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성립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소멸되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폴란드 회랑은 폴란드에 소속되었으나, 비스툴라 강구에 있는 단찌히는 주민의 90%이상이 독일인이었으므로 폴란드에 주지 않고, 일단 열국의 공유권을 승인하였다. 타우어가 고등 판무관으로서 자유시 헌법을 작성하여, 그 해 11월 15일 헌법이 발효되고, 동시에 국제 연맹 보호하의 자유시로서 성립하였다. 그러나 그해 바르샤바 조약에 의해 폴란드는 자유시에 대해 내정 간섭 및 일부 외교를 제외한 외교 경제 세무에 관해 광범위한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회랑에 의해 우수한 무역항을 동프로이센과 격리당한 독일은 나찌스의대두와 함께 진출, 단찌히 시 의회에 43명의 나찌스 당원이 의석을 차지하였고, 국제 연맹과 폴란드의반대를 무릅쓰고 사실상 헌법을 파기, 레스터 고등 ㄱ판무관을 감금하였다. 폴란드 단찌히협약에 의해 실질적인 나찌스 지배가 성립되었고, 나찌스 당 단찌히 지도자 포르스터가 시의 주권자가 되면서 대 폴란드 16개조 요구 중에서 단찌히의 독일 반환을 주장하였다. 자유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과 동시에 독일의 수중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