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전쟁은 미국에 있어서의 남부와 북주간의 내전 제2차 아메리카 혁명이라고도 하는데, 이 전쟁으로 남부의 플렌테이션, 노예제도가 폐지되고, 북부의 산업 자본의 승리가 확립되어, 근대 국가로서의 아메리카 통일이 완성되었다. 남북 대립의 근본 원인은 남부의 노예 제도가 획기적으로 발전한 데 있었다. 19세기 전반 미국은 서부로 눈부신 팽창을 하고 있었으나, 남부도 면 재배가 융성하여 노예제 사회로 현저한 발전을 이룩함에 따라, 목화거래를 통하여 영국과 유대를 맺고, 자유 무역을 주장하여 국내 시장을 통일하였다. 이에 보호 무역을 요구하는 공업적인 북부와 대립하게되었고, 또한 남부의 플랜티는 연방 정부를 지배하여, 북부가 자유 사회로 발전하는 것을 저지하였다. 이러한 남북의 대립은 남북의 타협적 정치가의활동으로 19세기 전반에는 회피할 수 있었으나, 남부의 플랜터가 정치 권력의 유지와 노예제의 모순을 타개하는 방책으로, 남북 타협의 기본선인 미주리협정을 폐지하고 노예제를 서부에까지 확대하려하자, 불가피하게 되었다. 북부에서는 인도주의적 노예제 반대 운동이 일어났지만, 노예제 확대에 반대하는 북부 및 서부의 만주 세력이 결집하여 공화당이 성립되었다. 공화당의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제주는 연방을 탈퇴하고, 아메리카 맹방을 결성하였다. 마침내 남부군의 섬터 요새에 대한 공격이 발단이 되어, 4년간에 걸친 남북 전쟁이 시작되었다. 북부는 인구 및 경제력으로 남부를 월등하게 능가하고 있었지만, 전쟁 초기에는 북부가 불리하였다. 링컨이 노예해방 선언을 선포하여 북부의 전쟁 목적을 대외적으로 명백하게 하자,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간섭이 좌절되고, 북부의 전의는 앙양되었다. 이리하여 전쟁의 후반기에는 북부의남부 해안 봉쇄 작전이 주효하였고, 또한 그란트 장군의 공격 작전으로 전국은 북부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드디어 남부의 무조건 항복으로 내전은 종결되었다.
남북조 시대는 중국의 시대 구분의 하나. 남조는 동진을 이어 강남 지방에 건국되었던 송. 제 양 진 등 네 왕조르 ㄹ마랗며 이에 오 동진을 합쳐 6조라고도 호칭된다. 북조라 함은, 5호 16국의 혼란을 통일한 북위를 비롯하여,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등 5조를 말한다. 연대적으로 말하면, 북위가 북중국을 통일한 진이 수에 멸망되어 남북 중국이 통일된 약 150년간을 가리킨다. 이 시대의 특징은 왕조 흥망이 빈번하고, 정치적 혼란 상태가 계속되어, 중국은 크게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남조의 지배자들은 진의 남천과 더불어 북중국에서 이주해 온 귀족으로, 전통 있는 문화의 보호자로서, 이른바 귀족 정치를 행하여 황제 권력을 제약하였다. 북조의 지배자들은 북방 민족출신자가 많으며, 강대한 무력을 배경으로 한민족을 억압하며, 황제의 독재 권력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균전법도 이와 같은 국가 권력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다고 생각된다. 문화적으로는 남조는 문학 예술이 현저하게 발달한데 반하여, 북조는 경학을 중시하여 한문화 섭취에 힘썼으나, 특별히 발전된 것은 없었다. 남조 문화는 화려하여 문학 회화 서도 등에 도 연명고 개지, 왕 희지 등이 배출되었고, 양의 소명 태자가 편찬한 문선은 당시의 대표적 명문을 수록한 편저이다. 남북조 모두 불교가 흥륭했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런데 숭불 방법에는 남북이 서로 달랐다. 대게 북조에서는 부처의 왕자들 동등하게 생각한 데 반하여, 남조에서는 부처를 왕자의 상위에 두었다는 점이다. 불도징, 쿠마라지마는 역경과 흥법에 힘썼고, 법현 송운 혜생 등은 구법을 목적으로 인도 서역 등지에 여행하였다. 뚠황 원깡등의 석굴 사원이 창건되었고, 도교도 성행하여 교의 교단이 정비되었다. 이 시대는 정치적 혼란에도 불구하고 문화는 현저하게 발달되었고, 수 당의 통일 국가 출현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균전제 부병제 등 북조의 제도도 수 당에 계승되었다. 일본:일본의 카마쿠라 바쿠후가 멸망한 남북의 양조가 통합되어 부로마치 바쿠후의 전국 통일이 완성된 약60년간을 말한다. 카마쿠타 바쿠후를 타도한 켈루 중흥에 공이 컸던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고다이고 텔노오로부터 이반하여, 황통의 다툼을 이용해서 코오묘오 텐노오로부터 이반하여, 황통의 다툼을 이용해서 코오묘오 텐노오를 쿄오토에 옹립한 것이 북조이다. 이에 고다이고텐노오는 남쪽의 요시노로 탈출하여 요시노 조를 세우니, 이것이 정통을 자랑하는 남조의 시작이다. 그 후 남북조가 대립하여 전국적으로 대규모의 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60년간의 동란 중에, 호족 영주층의 소오료오제적 지배 조직이 해체되고, 중소 묘오슈층의 장원 영주로부터의 지배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점고하고, 이에 대하여 제국의 슈고가 무력 투쟁에 참가하여, 슈고다이묘오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것은 곧 남북조의 동란이 사회 번혁의 조짐을 수반한 중요한 점인 것이다. 이 시대의 특색으로는 1)고대 권력의 쇠퇴 및 고대적 귀족 세력과 전통적 귀족 문화의 조락 2)렌가 차카이의 융성과 타이헤이키 에 나타나는 무사, 농민적인 혁신 문예의 발흥등을 들 수 있다.
남월은 진의 멸망후 한의 무제시대까지 현재의 광뚱 꽝시 양성과 베트남의 북부를 영유했던 나라. 건국자는 진정는 진말의 혼란시에 전임자인 임효의 위임을 받아 남해 군위가되고, 이윽고 진이 멸망하자 독립하여, 인접한 계림 상군을 빼앗아 남월국을 세워 무왕이라 칭하고, 번우에 도읍을 정했다. 남월의 주민의 대부분은 월인이었으나, 조 타에게는 잘 귀복하였다. 한의 고조는 남월을 토벌할 만한 여력이 없어서, 육 가를 파견하여 화친 관계를 맺고, 남월의 침구를 방지하였다. 그러나 여태후가 남월에 대한 철기의 수출을 금지시킨 데서 양국간의 친화는 깨어지고, 타는 스스로 제라고 칭하고, 한의 남변을 침입하였으며, 나아가서는 민월과 서구락도 복속시켜 크게 위세를 떨쳤다. 여태후의 남월 토벌이 실해한 후. 문제는 또 육 가를 보내어 화친을 맺게 되었다. 타는 사망하고 손자인 호가 뒤를 이었으나, 한에는 영략한 무제가 재위 중이어서, 한의 남월에 대한 압박은 이로부터 더욱 심해졌다. 호의 손자인 흥의 시대에는, 남월에 내란이 일어나, 여 가 등이 왕과 모후 및 한의 사자를 살해하고, 흥의 이복형인 건덕을 옹립하여 한에 반항하였다. 그러자 무제는 황급히 복파 장군 노 박덕 및 누선 장군 양 복 등이 이끄는 대군을 파병하여 남월을 공략하게하여, 수도인 번우를 함락하여 남월은 완전히 멸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