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은 여진족이 만주 화북 지방에 세웠던 왕조. 본래 여진족은 요에 복속하고 있었으나, 얼마 후 북만주 하얼삔 동남의 아청 부근에 있던 생여진의 완옌부 세력이 커지게 되자. 그 추장 아구다는 여진족을 통합하여 요에 반기를 들고 일어나, 제위에 오르고 국호를 금이라 칭하였다. 금이라고 한 것은 완옌부의 고지인 아시가 여진어로 황금을 의미하는데서 나온 것이라 한다. 아구다, 즉 태조는 다시 요의 동경 요양부를 함락하고, 송의 요청을 들어 요의 서경 대동부 및 남경 석진부를 공략, 다음 태종은 요의 천조제를 잡아 이를 완전히 멸하였다. 금과 송이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중국 북부의 연운 16주를 둘러싸고 그 영유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 금군은 대거 남하하여 송의 화북 지방으로 국도인 변경을 함락시키고, 송의 휘종. 흠종의 부자 2제를 비롯하여 황족 정신을 포로로 하고, 화북의 여러 지방을 손에 넣었다. 금은 중국북부에 대한 지배에 앞서서 먼저 유 예에게 제라는 괴뢰 국가를 세우게 했으나, 이어 금의 회종이 위에 오르자 이를 폐하고 남송과 화의를 맺었다. 동은 화이 허 강으로부터 서는 싼시의 대산관에 이르는 국경선을 정하고, 송으로부터 은견 세공을 받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금은 서하나 고려의 국왕에게도 신례를 바치게 하여 명목상 동아시아 여러 나라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었다. 여진인은 태조때에, 그 이전부터 있었던 군사 제도를 정비하여 맹안 모극이라고 하는 군사 겸 행정 조직을 편성하였으며, 희종은 여진임을 그들의 조직 그대로 하여 화북 지방으로 이주시키게 하였고, 다음의 해룡왕은 도읍을 상경 회령부에서 연경으로 옮겼다. 이리하여 중국식 중앙 집권적 전제 국가 체제를 확립하였으나, 그 시책이 옮지 못하여 폭동이 일어나 왕은 살해되고, 세종이 즉위하였다. 그는 안으로 정치 경제 및 문화의 전반에 걸쳐 훌륭한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밖으로는 평화의 유지를 위해 진력하였으므로, 그의 재위 29년간은 가장 안정된 시대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여진인의 한화와 곤궁화를 염려하여 그 보호 구제를 꾀함과 동시에, 근본적 대책으로 여진어나 여진 문자의 장려 등 국수주의 정책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효과는 소기한 대로 되지 못하였으며, 다음의 장종 이후에는 여진인과 한인의 대립이 격화하여 한인의 폭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여진인의 한화와 곤궁화를 더욱 촉진하게 되었고, 정부 재정도 궁핍하여 교초를 남발하게 되자, 경제는 혼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거기다가 13세기에 들어서면서 칭기즈칸의 중국 북부 진격으로 선종은 서울을 다시 변경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고, 다음 해에 연경을 공략당하고, 이어 몽고군의 공격에 의해 변경이 함락되자, 금은 10대 멸망하게 되었다.
금의 병용 시대는 신석기 시대에서 금속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적 시대. 석기와 최초의 금속기인 동기 또는 청동기가 병용된 것이 특색이다. 이 말은 19세기의 후반 무렵부터 이탈리아의 학자들이 사용하기 시작한 Calcolitthic 또는 Eneolitthic를 의역한 것이며, 또한 Copper Age라는 말과도 일치한다. 그러나 내용상으로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청동기 시대의 문화라고 말하지만, 당시 일반적으로 사용된 이기는 그 최전성기에 있어서조차도 석기를 사용한 것이 보통이며, 청동 제품은 특수한 무기나 장신구에 한정되어 있었다. 따라서 앞에서 말한 특색을 기준으로 하여 이 과도기의 문화를 설정함은 타당치 않다. 만약 설정한다고 하면, 주조 야금술을 모르면서 고타법에 의해 금속으로 간단한 기구를 제작하고 있던 단계를 표시하여야 한다고 생각되나, 일반적으로는 아주 유치한 주동 제품의 시대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란의 테페갼. 수사 제1층, 샤르크 제1기, 메소포타미아의 할라프, 우바이드, 우루크, 가우라의 각 기, 소아시아의 트로이의 제1층. 크레타의 초기 미노아 기들을 예거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된 특색으로 서는, 동제품은 검 투부 창 촉 등의 무기나 장신구에 많으며, 일상 사용되는 이기는 돌이나 나무를 재로로 하였으며, 이미 농경 기술이나 관개 여경의 발달을 보았고, 녹로나 수레의 발명으로 대량 생산과 교역이 발달된 한편, 계급도 분화되어 원시적 소국가의 형성 시기에 해당된다. 하여튼 이것은 선진 문화 지역에서만이 생각될 수 있는 것으로서, 선사 유럽과 같은 후진 문화권에 대해서는, 해당되는 문화의 단계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금석화는 중국에서는 고대로부터 금속이나 석제에 글을 새겨 길이 후세에 전하려는 풍습이 있었다. 금속에 새긴 것을 금문, 석재에 새긴 것을 석각문이라 하여 합해서 금석문이라 하고, 이를 연구하는 것이 금석학이다. 선진의 종정, 시황제가 각기에 세운 석각, 한대의 화상석, 그 후에 증가하는 묘비병 기사비석경 또는 동경 고전 따위가 주된 연구 대상이다. 이 학문의 개척자는 북송의 구양 수로서 금문 석각의 탑본을 모아서 연구하고, 집고록 발미 10권을 저술하였다. 그 외에 송의 유 창은 금문을 연구하였으며, 휘종의명에 의하여 선화 박고 도록이 편판되어 현재의 고동기의 명칭은 대게 이 책에 의한다. 그러나 남송의 설상공이 역대 종정이기 관지법첩 20권을 내게 되자, 금문의 해독이 진척되었으나 기형학은 반대로 등한시하게 되었다. 원 명대에는 좀 쇠퇴하다가 청조에서는 고증학의 발달에 따라 다시 활기를 띠어, 고증학의 시조인 고 염무의 금석 문자기 6권. 주 이존의 금석 문자 발미 6권을 위시하여, 금문에서는 전점의 식육장락당 고기 관지고 4권이 나왔다. 그는 문자학에 뛰어나 금문의 해독에 독자적인 경지를 열었다. 또 창 야오텐은 고전, 특히 주례에 정통하여 실물과문헌의 비교 대조에 뛰어났다. 그러나 청말의 우 따청은 금문의 천재적 해독자로서, 그의 역문은 극히 정확하고 또한 종래의 전통화된 오류를 정정한 바 많다. 그의 저서는 자설 1권, 설문 고주보 14권 외에 널리 금문의 탐본을 수집하여 석문 해설을 붙인 각재집고록 26권이 영인되었다. 석각의 연구에 있어서는 고 주 양인 다음에, 전 대흔의 잠연당 금석 발미 20권. 무 역의 수당 금석 문자발, 필 원의 관중 금석기, 중주 금석기, 완 원의 양절 금석지 등이 나와서 지구별의 석각 수집이 성행하였다, 한편 시대적으로 수집하는 경향도 있어, 왕창의 금석췌편 160권은 그것을 집대성한 것이라고 일컬어지며, 이 책에서 누락된 것이나, 그 후에 발견된 것을 보충하기 위하여, 육 요휼의 금석 속편21권. 육 증상의 팔경실 금석 보정이 간행되었다. 민국 시대에 들어와서는 왕 꿔웨이는 스승인 로전위가 수집하여 영인한 자료를 이용하여 금문의 해석에만 치우치고 있었던 청조의 금석학을 탈퇴하며, 기형학 금문 서체론에 뛰어난 창견을 나타냄과 아울러 금문을 고대 사료로서 구사하여, 역사의 연구에 중대한 역할을 하였다. 그의 학문을 계승한 학자로서는, 은 주의 청동기 명문 연구 금문총고 등을 저술한 꿔 모뤄와 보은루이기 도록 송재길금 도록을 저술한 룽 껑의 업적이 높이 평가되며, 이 밖에 쉬 중슈 우치창 천 멍쟈 등이 있으며, 중국 이외의 학자로서는 카알그렌의업적이 주목할 만하다.